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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얼솜 Oct 19. 2022

깍두기의 낭만 음식

[만 9세 소녀의 나 홀로 유학 생활 - #5]


2002년 4월까지 우리 가족의 일요일 아점 메뉴는 늘 정해져 있었다. 아빠가 해주는 빨간 두부조림. 아침이던 점심이던 혹은 아점이던 일요일 우리 가족의 아침 첫 식사 메뉴는 늘 빨간 두부조림이 반찬으로 나왔다. 그래서 내게 빨간 두부조림은 일요일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2002년 5월, 일요일의 상징이 바뀌었다. 


매주 일요일마다 원장 선생님께서는 강제로 우리에게 외출 시간을 주셨다. 대략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 정도까지는, 그러니까 아침을 먹고 나가서 저녁을 먹기 전 까지는 외출을 해야만 했다. 난 집에서 공책에다가 그림을 그려서 캐릭터 놀이나 하고 싶은데 왜 외출을 하라는 건지... 처음에는 외출하는 게 싫기도 했고 왜 해야 하는지 몰랐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원장 선생님 부부도 휴식이 필요해서 그랬지 싶다. 대 여섯 명의 중, 고등학생 사춘기 소녀들과 마냥 해맑은 초등학생 여자애를 매일같이 새벽부터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돌보고 공부를 시키려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왜 새벽부터 자정까지 인지는 추후 우리 어학원 스케줄을 설명하는 글에서 알려줄 예정이다.) 그래서 선생님의 휴식 보장과 사춘기 소녀들의 문화생활을 위해 강제 외출 시간이 생겼다.


외출시간은 곧 내가 깍두기가 되는 시간이다. 언니들은 한국 나이로 14살에서 18살이었으므로 현지 고등학교를 다녔다. 평일에는 무조건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야 했기에 주말 외출 시간이야말로 친구들과 만나 우정을 다질 수 있는 기회였다. 친구를 만나지 않으면 우리 시골 마을에 딱 하나밖에 없었던 PC방에 가서 인터넷을 하곤 했다. 그렇게나 귀한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서 동네의 유일한 마트에서 쇼핑을 하며 외출을 마무리한다. 완벽하게만 보이는 언니들의 외출에 한 가지 함정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 깍두기 동생이었다. 이 모든 스케줄에는 그림자처럼 깍두기가 늘 옆에 있었다. 깍두기를 데리고 다니는 고통은 매주 돌아가면서 철저하게 순서를 지켜 돌아갔다. 그리고 깍두기는 언니들의 속도 모르고 그저 해맑고 신났다. '오늘은 누구랑 나갈까?' 


깍두기가 신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언니들이 사주는 시나몬롤과 망고주스 때문이었다! 2002년만 해도 한국에는 망고라는 과일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망고는 동남아시아에서나 먹어볼 수 있던 귀한 과일이었었으니 말 다했지. 더군다나 주스는 오렌지 주스나 포도 주스가 전부였던 내게 망고 주스라니. 이것 하나만으로도 외출을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푸른 들판 위 뜬금없이 있던 하얀 칸틴

둥글게 주름이 가있던 투명한 플라스틱 컵에 망고 주스, 정확히 말하자면 망고 셰이크를 가득 담아 은박지를 위에 뚜껑처럼 감싸준다. 그리고 내 손바닥보다 더 큰 동그랗고 두툼한 시나몬롤. 이 두 개 합쳐서 기껏해야 10페소 정도 했나 싶다. 그때 당시 10 페소면 우리나라 돈으로 200원 했으려나...? 쟁반에 담아 빈자리에 앉아서 먹으면 그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가끔 언니들은 내게 아주 조심스럽게 부탁하기도 했다. "통통아, 여기서 이거 잠깐 먹고 있으면 언니가 친구만 만나고 금방 올게! 절대 아무랑도 말하지 말고 여기서 가만히 있어야 해? 언니가 딱 10분만 있다가 올게?" 유학도 혼자 온 판에 그깟 10분 못 기다리랴. 자신 있게 알겠다고 말하고 하얀 테이블 위에 내 보물 공책을 꺼내서 캐릭터 그림을 그리며 놀곤 했다. 끈적이는 설탕 시럽이 잔뜩 뿌려진 시나몬롤, 그리고 달콤한 망고 셰이크. 이 맛을 본 이후에는 매주 일요일 외출이 그렇게나 기다려질 수가 없었다. 


이후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만의 주말 음식은 시나몬롤과 망고주스였다. 잠시 한국에 돌아왔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까지도 망고가 한국에 흔하게 보급되지 않았던 때였다. 어렵게 구해서 먹어도 도저히 그때 그 맛이 나질않아 더욱 그리웠다. 재밌는 점은 망고 셰이크와 시나몬롤이 흔해진 지금, 동일한 조합으로 먹으니 그 둘의 맛이 썩 어우러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왜 그렇게 맛있었을까? 아마 그 맛은 혼자서 언니들을 기다릴 수 있을 정도로 다 컸다는 뿌듯함과 자연에서 오는 평화로운 휴식, 그리고 만 9세의 나 홀로 자유시간에서 오는 귀한 맛이었겠지. 


빨간 두부조림에서 시나몬롤과 망고주스, 가족과 함께하는 아침에서 나 혼자 지내는 주말. 나름의 낭만을 즐겼던 딱 그만큼 한 뼘 더 성장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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