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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얼솜 Jul 19. 2023

어쩌다 보니 실연을 선사한 키미

[만 9세 소녀의 나 홀로 유학 생활 - #6]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두 개의 학년이 합쳐져 있는 아주 작은 곳이었다. 

산속에 있는 마을에 학교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학교로 다니긴 했지만 그곳은 또 교회이기도 했어서 작고 기다란 1층짜리 건물에 교실이 총 4개 정도밖에 안 됐고, 중간에는 꽤나 큰 예배당으로 쓰이는 강당이 있었다. 1, 2학년이 한 교실을 쓰고 3, 4학년이 한 교실. 그리고 아마 고학년이라 그랬는지 5학년 6학년은 각각 한 개의 교실을 썼다. 당시 4학년이었던 나는 두 번째 교실을 사용했는데 반 학생이 전부 30명이 조금 안 됐던 기억이다. 학교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으니 조금은 왜곡되었을 수도 있다만 말이다. 


그날은 햇빛이 유독 쨍쨍하던 날이었다. 간식 시간인지 점심시간인지 여하튼 간 쉬는 시간에 교실 밖으로 나와 풀밭에서 놀고 있었다. 낯가림이 없었던 나는 아마 금세 학교 친구들과 친해져서 말이 잘 안 통해도 그저 뛰고 웃고 같이 그네도 타고 아주 잘 놀고 있었다. 한참을 망아지처럼 뛰어다니고 있는데 우리 반 남자아이가 갑자기 막 나를 향해 달려왔다. ‘뭐야? 왜 따라와?’ 잡기 놀이를 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나는 다른 방향으로 달려갔다. “No come! No No!” 대충 날 잡지 말라는 엉터리 영어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신나서 막 뛰어갔다. 그런데 당시 통통했던 나는 이내 몇 발자국 가지도 않고 숨이 차서 헥헥거리고 쪼그려 앉았다. “아 힘들어!” 쪼그려 앉은 김에 풀밭에 들꽃이나 보고 있는데 남자아이가 내게 왔다. “Hey Kimmy! This!” “What? This what?” 남자아이는 손바닥보다도 작은 장난감 새집 같은 서랍을 건네줬다. “Kimmy, This is yours. I will give this to you. Try to open!” 뭐라 뭐라 말하긴 하는데 아직까지 영어가 유창하지 않았던 나는 그저 멀뚱멀뚱 보고만 있었다. “This what?” 바로처럼 ‘디스 왓?’만 말하던 4학년 키미. 남자아이는 착하게도 그 장난감 새집의 서랍을 열어서 보여줬다. “You can eat this, Kimmy!” 안에는 작은 알사탕이 들어있었다. “Candy? Me? Eat?” “Yes, It’s yours Kimmy. I give this to you!” 이 사탕을 왜 주지? 어리둥절했지만 일단 먹으라니 해맑게 사탕을 꺼내서 교복 주머니에 넣었다. “Thank you!” 그리고 뒤돌아서 가려는데 남자아이는 또 불러 세웠다. “Kimmy, Kimmy! Bring this toy too!” 얘 자꾸 뭐라는 걸까? 슬슬 답답하고 쉬는 시간이 끝나가는데 더 못 노니까 조금 짜증이 났던 것 같다. “Candy, THANK YOU!” 고맙단 말을 못 들었는가 싶어서 최대한 정확하게 Th 번데기 발음까지 구사하며 땡! 큐!라고 큰 소리로 말했는데, 남자아이는 계속해서 “Bring this toy” 하면서 장난감을 건네줬다. 아아. 이거 가지란 소리구나? “Me? This? Toy? You?” 장난감을 가져오는 시늉을 하면서 이리저리 말했더니 남자아이는 이내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Ok! THANK YOU!” 이 장난감을 왜 줄까 싶으면서도 아무 생각 없이 받아서 사탕도 맛있게 먹고 휙 돌아가 내 친구들하고 재밌게 놀았던 것 같다. 뒤에서 남자아이가 쫓아오면서 뭐라고 한 것 같은데, 더 이상 시간을 뺏기기 싫어서 대충 “Yes, Yes! Byebye!” 하고 내 갈길을 갔다.


방과 후 집으로 돌아와서 바로 tutor 수업을 시작했다. “Kimmy, How was your day? Is there anything new in your school? (키미, 오늘 어땠어? 학교에서 무슨 일 없었어?” 내 tutor 선생님은 막 출산을 한 엄마였는데 유난히 날 예뻐해 줬던 기억이 난다. 그날도 어김없이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길래, 사탕 사건을 얘기해 줬다. “My school friend, candy give me” 선생님은 활짝 웃으며 “Oh really? Was that a boy or a girl? (그래? 남자아이가 아니면 여자아이가?)” “Boy! This toy give me, also (남자요! 이 장난감도 줬어요.)” 그리고선 주머니에서 작은 장난감 새집을 보여주었다. 나는 원체 수다스러운 성격이어서 어떻게 그 남자아이가 사탕을 줬는지 열심히 시연도 했다. “Play time! Friend said Kimmy Kimmy! And then this candy give me. Toy give me also (놀이 시간에 친구가 키미, 키미하고 부르더니 사탕 하고 장난감 줬어요.)” 내 말을 들은 선생님은 박장대소를 하더니 “He has crush on you, Kimmy!(그 애가 널 좋아하는구나, 키미!)”라고 말해줬다. 당연히 crush가 무슨 뜻인지 몰랐던 나는 “Crush? What?”하고 되묻자 선생님은 “He likes you, Kimmy! (너를 좋아하는 거야, 키미!)”하고 알려주셨다. 아마 5,6학년 때 그 말을 들었으면 달랐을까? 좀 설레었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때 당시 키미는 고작 만 9세의 통통하고 혼자 잘 노는 아이였다. 날 좋아한다는 말에도 아무 생각 없이 오늘 단어 몇 개 외우냐고 다른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아이와의 추억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 보면 역시 사탕을 줘서 그냥 먹고 끝이었나 보다.


사실 그 아이의 이름도 생각난다. Tom이었나 Tomy였나… 아마 내 뒤에 따라와서 본인 집에 놀러 오라던지, 같이 놀자던지 뭐 이런 말을 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본의 아니게 그 말을 무시해 버려서 미안하다. 어쩌다 보니 인생 첫 실연을 선사한 만 9세의 키미. 그리고 아마도 처음이었을 실연을 당한 토미에게 심심한 사과를 만 30세의 에리얼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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