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수용하는 방법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by 앨리스

진리를 탐구하거나 받아들이는 능력은 진화적 적응과 한참 거리가 있는 것 같다.

오히려 직관에 따라 범주를 만들고, 다름을 배척하며, 편견을 가지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

혼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그렇게 진화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혼돈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과, 그 수단이 직관이 되었을 때의 위험함, 그리고 우리 존재의 의미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인간이 어째서 진실을 수용하는데 그토록 애를 먹는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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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혼돈에 대해

(혹은 공백에 대해)


...갑자기 '우리 모두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 "의미는 없어!" 마치 내가 살아오는 내내, 그 질문을 할 순간만을 열렬히 기다려왔다는 듯 아버지는 내게 인생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통보했다. "의미는 없어. 신도 없어. 어떤 식으로든 너를 지켜보거나 보살펴주는 신적인 존재는 없어. 내세도, 운명도, 어떤 계획도 없어. 그리고 그런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이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고 자신도 의미가 없다는 무시무시한 감정에 맞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상상해낸 것일 뿐이니까. 진실은 이 모든 것도, 너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란다.(54)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 감각. 질서를 잃어버리는 느낌. 울퉁불퉁한 세계에 떨어져 나뒹구는 기분.

세상에 내던져진 우리의 혼돈이다.


혼돈은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모든 것의 근원, 내지는 시작 같다.

혼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질서를 찾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 땅은 혼돈하였으나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며 질서를 찾아간다.

대부분의 우주발생설은 카오스(혼돈)에서 코스모스(질서정연한 우주)가 되었다고 본다.


혼돈은 좀 더 명확한 정의가 필요한데, 단어의 이미지는 뒤죽박죽인 인상을 주지만 본질적으로 '공백'에 가까워보인다. 카오스의 어원이 '캄캄한 텅빈 공간'이며, 창세기의 하나님이 혼돈에서 질서를 찾아가는 것도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표현되는 것을 보면 '비어있는 상태'를 시작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철학적이든, 종교적이든, 과학적이든, 혼돈(=공백)에서 질서를 찾는 것은 인간의 DNA 안에 녹아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 읽은 다른 책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이유도, 의미도 없다는 인식 뒤에 숨어 있는 ‘공백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것, 모든 사람을 ‘인과 관계화’하는 경향이 있다.(84)


공백은 인간을 견딜 수 없게 만든다. 비어있으면 메우고 싶어진다.

그러니까 의미라는 건, 공백을 허용하고 싶지 않은 인간이 존재를 소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하나의 방법 같다.

설명이 되지 않는 것들에 이름을 붙이는 것, 무언가를 분류하는 행위,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전세계를 누비며 물고기를 모으는 것도 그런 감각이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안타깝지만 인간은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에 (자연의 관점에서 봤을 때) 별로 재능이 없는 것 같다.




인간의 질서

분류하고 범주화하는 것


실제 자연 세계가 우리가 설정한 범주대로 분류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려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 관념이 학계 밖으로는 도저히 퍼져나가지 않는 것을 보면서 크게 실망했다. 그는 자기가 대적하기에 너무 센 적수를 상태하고 있는 것 같다고 걱정스러워했다. 그 센 적수는 바로 직관이다. 그는 사람들이 결코 편안함을 진실과 맞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244)
...코페르니쿠스를 예로 들었다. 그 시대 사람들이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면서 움직이고 있는 게 별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이야기했다. ... 어떤 사람들에게 별들을 포기하는 것은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그건 그들이 너무 작고, 너무 무의미하고, 너무 통제 불능으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들은 그것을 믿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그들은 메신저를 공격했다. 코페르니쿠스가 별들을 포기했을 때 그는 이단이라는 저주 어린 판결을 받았다.(247)
"내겐 그리 충격적이지 않네요." 내가 어류의 범주가 해체된 일에 관해 숨 가쁘게 설명하고 나자 그가 한 말이다. 그것은 정확히 그가 자기 학생들에게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우리 발밑의 가장 단순한 것들조차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진보로 나아가는 진정한 길은 확실성이 아니라 회의로, "수정 가능성이 열려 있는" 회의로 닦인다는 것.(250)


*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진화적 적응으로 '분류 충동'이 존재한다. 습관적으로 사람과 사물, 그밖에 존재하는 것들을 범주화하는 것이다. 뇌의 패턴 연상 신경망은 사물의 유사성으로부터 범주를 만든다. 다만 이 범주는 불명료하며, 특별한 통찰력이 없다.


인간이 직관에 따라 자연 세계를 범주화하는 행위는 편리하지만, 결코 진실은 아니다.'어류'라는 분류는 물속에 사는 비늘있는 생물을 인간의 직관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직관은 때로 틀린다.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당연한 것들이 때론 당연하지 않고,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언제나 더 타당한 진리에 의해 수정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을 '불안'하게 만든다.

내가 발딛인 세계가 끊임없이 출렁대는 기분.


어떻게 하면 우리는 조금 더 편안하게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까?

책에서 '언어'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언어에 답이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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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언어에 대해

무언가를 정의하는 방법


트렌턴 메릭스는 만물의 존재에 관해 너무나 깊은 의심을 품고 있는 나머지 의자처럼 구체적으로 보이는 것들조차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입자들 위에 앉아 있다는 사실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 입자들이 정말로 "하나의 의자"를 구성하는 것일까? 그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 인간의 정신이 세상을 조각해내는 일을 늘 그렇게 잘하는 건 아니라는 것, 우리가 만물에 붙인 이름들은 짤못된 것들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노예"는 인간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자유를 누릴 가치도 없는 존재였던가? "마녀"는 화형을 당하는 게 마땅한 존재들이었나? 그가 의자를 예로 든 의도도 같은 맥락에 속한다. 겸손을 유지하라는 것, 우리가 믿는 것들, 우리 삶 속 가장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늘 신중해야 한다는 걸 되새겨보게 해주는 사례인 것이다.(94)
물고기에 대해 연민이 느껴진다고 했다. 일단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고 나면 더 이상 그걸 제대로 바라보지 않게 된다는 사실에 대한 연민이었다.(250)
드 발은 과학자들이 나머지 동물들과 인간 사이에 거리를 두기 위해 기술적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가장 큰 죄를 범하는 집단이라고 지적한다. 그들은 침팬지의 키스를 입과 입 접촉이라고 부르고, 영장류의 친구를 특히 좋아하는 제휴 파트너라고 부르며, 까마귀와 침팬지가 도구를 만들 수 있다는 증거에 대해서는 인류를 정의하는 종류의 도구 제작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해석한다. 어떤 인지 과제에서 동물들이 우리보다 뛰어나다면 그들은 그것을 지능이 아니라 본능이라고 치부한다. 이와 같은 수많은 언어적 수법을 드 발은 "언어적 거세"라고 표혔다. 즉 그것은 우리가 언어를 사용해 동물들의 중요성을 박탈하는 방식이자, 우리 인간이 정상의 자리에 머물기 위해 단어들을 발명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252)


*

언어는 세상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다. 의자가 물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할데 없는 사실이겠지만, 그것을 '의자'로 인식하는 것은 인간의 경험에 의한 적응적 해석이다.


언어가 중요한 이유는 언어 그 자체보다 언어를 사용하는 논리적 추론 때문이다. 인간은 옳고 그름을 논리적으로 추론한다. (다시 스티븐 핑커를 인용하면) "논리적 추론은 인간의 사고 전체에 걸쳐 존재하고, 우리가 언어를 이해할 때 두드러진다. 논리는 다른 사람들의 언어로부터, 또는 자기 자신의 일반화로 습득한 파편적인 사실들로부터 세계에 대한 옳은 것들을 추론하는 데 필수적이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받아들인다.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언어 사용에 몹시 신중해져야 한다.

무언가를 정의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그것이 나의 세계가 된다.


과학적 발견에 의해 세상에 대한 인식이 뒤집어지는 경험은 살면서 거의 경험할 일이 없는 반면에, 언어로 인해 인식이 뒤집히는 경험은 비교적 일상이다. 가령 혐오 표현이 등장한 후 우리는 상대를 어떻게 인식하게 되었는지?


그러니까 일상적인 차원에선 내가 사용하는 언어를 신중하게 고민해보는 것만으로 무엇이 옳은지에 가닿을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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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의미

서로서로 가라앉지 않도록 띄워주는 이 사람들의 작은 그물망이, 이 모든 작은 주고받음이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그물망이 받쳐주는 사람들에게는 어떨까? 그들에게 그것은 모든 것일 수 있고, 그들을 지구라는 이 행성에 단단히 붙잡아두는 힘 자체일 수도 있다. (226)


과학을 대하다보면 인간은 유전자의 생존과 번식을 위한 생존기계고, 우리의 마음조차도 자연선택이 설계한 적응 체계라는 생각에 존재적 회의가 찾아오는 것 같다. 책에서는 우리가 우주 속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허무주의보다, 우리가 주변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존재인지에 집중하자고 말한다. (어쩐지 얼마 전 본 영화 <에브리씽 에어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생각나..)


그리고 인간은 도덕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과학은 세계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떠한지 알려주지만, 어떻게 살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전적으로 인간의 도덕과 가치관의 문제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가능한 겸손한 태도로, 호기심을 잃지 않고 남은 시간을 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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