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직장인의 <가짜노동>

PM의 가짜노동 회고

by 앨리스

IT회사의 PM으로 일하면서 가장 즐겁고 보람 있는 순간은 배포가 나갈 때다.

서비스가 사용자에게 오픈될 때, 그동안의 모든 노력이 마침내 진짜 의미 있는 결과물이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보다 작은 회사에서 일할 때도 배포는 즐거웠지만 그 순간이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기획한 내용이 결과물이 되려면 개발 부서에 프로젝트의 중요성을 설득하며 다른 서비스와 우선순위를 다퉈야 했고, 마침내 내 순번이 되더라도 사소한 개선 건조차 배포가 나가기까지 여러 주가 걸리곤 했다. 그게 이직 사유가 됐다. 지금 회사에선 웬만큼 규모가 있는 피처도 개발 기간이 1개월을 넘는 일이 거의 없고 신규 서비스도 3개월이면 런칭한다. PM으로서 이보다 행복한 환경이 있을까.


어쩌면 그 점이 나를 일 중독자로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만 기획을 잘하면 무엇이든 결과물이 되니까. 그래서 업무 시간 내내 정말 치열하게 일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가짜노동>을 읽은 뒤로 의심병이 생겼다.


'이거.. 가짜노동인가 혹시?'



성과 과시를 위한 프로젝트 만들기


연초에 지난한 OKR 수립 과정을 거치며 의심이 시작됐다. 이게 정말 필요해서 하는 일이 맞나? 성과를 과시하기 위해 우리가 뭔가를 만들어내는 중은 아닐까? 이런 의심이다.


OKR을 수립하는 과정에 가장 강조되었던 것은 어떤 결과물을 만드는가 보다 '어떤 성과를 낼 수 있는가'였는데, 때로는 숫자로 성과를 표현하기 위해 불필요한 데이터를 뒤적일 때가 많았다. 신규 서비스의 목표 지표는 감으로 설정할 수밖에 없어서 그다지 관계없는 다른 서비스의 지표를 열심히 찾아다가 '대충 이 정도'라고 설정하는 식이다. (보여주기식, 보고용이라고 느껴질 수밖에)

a396afbf4a1a0d7cdd1a14c1ec6f3440e253eeb4-1200x630.png?w=950&fm=jpg&q=80 그럴듯한 OKR을 만든다는 것...


게다가 회사의 목표는 정해져 있고 우리는 사업이나 서비스가 아닌 플랫폼 조직이기 때문에 회사의 서비스적 목표에 얼라인할만 내용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그럼에도 회사의 주요 목표와 엮여야 과시할만한 성과가 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하는데 이것도 굉장한 '일'이었다.


성과 과시의 맥락에서 가장 마음을 괴롭게 했던 건 오직 프로젝트만이 성과로 표현된다는 점이다. 회사에는 두 가지 일이 있다. 당장 뭔가가 돌아가게 하기 위한 '운영 업무'와 목표를 가지고 성과를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 회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더 높은 고과를 부여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언제나 '프로젝트'다. 그러다 보니 팀원들이 업무의 상당 시간을 뭔가 프로젝트스러운 것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데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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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새로운 기능/서비스를 런칭하는 프로젝트는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고, 고객에게 새로운 가치를 주기 위해 언제나 중요한 일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최근 들어 명백히 성과를 보여주기 위한 업무를 만들고, 거기에만 목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장 처리하지 않으면 고객에게 불편을 주거나, 보안 등의 리스크가 발생할 수 있는 운영 업무보다 그럴듯한 성과로 포장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과시하기 어렵고 시간만 뺏기는 운영업무는 폭탄 돌리기처럼 서로 미루는 처지가 됐다. (정말로.. 서로 미루다 감정이 상하는 지경이 됐다)




근본적인 노동이 아닌 노동


“새 소프트웨어 출시를 위해 코드를 쓰고 있다면 그건 근본적인 노동이다. 상품을 개선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방식에 대한 규칙을 쓰고 있다면 그건 한 단계 벗어난 것이다. 어떤 상품을 조립하는 더 나은 방식을 시험하고 있다면 그건 근본적인 노동이다. 하지만 제안 시스템을 개발하는 TF팀을 만들고 있다면 한 단계 벗어난 것이다. 고객과 상담을 하고 있다면 그건 근본적인 노동이다. 고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면 그건 아마도 한 단계 벗어난 것이다.”


위의 관점에서 PM은 주로 한 단계 벗어난 일을 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방식을 정의하고, 고객을 대면하는 대신 고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주로 대부분의 시간에 회의를 한다.


근본적인 노동이 아닌 것에 대한 고민은 이런 식으로 찾아온다.


PM의 기본 소양 중 하나는 데이터를 보는 능력이다. 어떤 것이 중요한 지표인지 설정하고, 직접 SQL 쿼리를 활용해 데이터를 추출하거나, tableau, redash 같은 분석 툴을 다룰 수 있다. 데이터를 보는 건 물론 근본적인 노동이 아니지만, PM이 하는 의미 있는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숫자로 구성원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도 있고, 일의 타당성이나 개선 여부를 확인할 때 중요한 의미를 갖기도 한다.


그러나 '데이터 기반'이라는 것이 모든 일의 절차가 되자, 이따금 너무 당연한 문제를 설명하거나 해결하기 위해 데이터를 본다. 경험이나 직감, 혹은 간단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들도 데이터가 없으면 아무도 설득할 수 없다. 예를 들면 '너무 많은 정보 입력 절차가 사용자들을 다 달아나게 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각 입력 과정마다 얼마나 많은 사용자가 이탈하는지 데이터가 필요하다.


+ 데이터는 주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과제를 끌어가기 위한 근거 자료일 때가 많아서, 데이터 분석을 설계하는 시점에 이미 결과를 가정하고 있을 때도 많다. 기대를 충족시켜 주는 숫자가 나오면 기분이 좋지만, 데이터를 다루는데 들어가는 지겹게 긴 시간에 비해 결과물이 단순히 상위의사결정자들을 위한 보고용 숫자라는 생각이 들면 씁쓸해질 때가 있다.


이외에도 동일한 내용의 반복되는 리뷰 미팅, 프로젝트 관리를 위한 jira 세팅, 보고용 프레젠테이션 만들기 같은 절차적인 일에 시간을 쏟고 있자면 내가 진짜 의미 있는 일을 하지 못하고 시간을 낭비한다는 생각을 한다.



너무나도 긴 노동시간

파킨슨의 법칙
일은 그것의 완수에 허용된 시간을 채우도록 늘어난다. 만일 사람들에게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10시간이 주어진다면 그들은 10시간을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똑같은 일에 25시간이 주어진다면 놀랍게도 그 일은 결국 25시간이 걸릴 것이다. 사람들이 게으르거나 기만적이거나 의도적으로 속이려 해서가 아니라 그저 “우리가 달성해야 하는 업무는, 써야 하는 시간에 비례해 중요성이 증가하고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노동시간이 40시간 > 36시간 > 35시간 >32시간으로 차츰 줄었는데 정말 놀랍게도 업무량이 아니라 노동시간만 줄었다.


PM의 결과물 중 그나마 가장 근본적인 노동에 가까운 기획서는 사실 작성하는 데 긴 시간이 들지 않는다. 병렬로 진행되는 프로젝트가 몇 개씩 돼서 업무 시간 내내 회의와 멘션에 시달리지 않는다면 초과근무를 하지 않고도 할 일을 할 수 있다.


PM은 개발자나 디자이너처럼 노동시간이 명백하게 결과물을 만드는 데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더 쉽게 가짜노동자가 된다. 업무를 부풀리기도 쉽고, 무의미한 노동을 하기도 쉽고, 이유 없이 바빠질 수도 그냥 한가해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은 금기이기 때문에 스탠드업 미팅 때는 어떻게든 의미 있게 바쁜 척을 한다. 가짜노동이 지적하는 그대로다. (물론 긴급 대응으로 오픈일이 찍혀서 치고 들어오는 상황은 예외지만, 지금까지 미룰 수 없는 일은 거의 못 봤다)


만약 초과근무 중이라면 아이젠하워 매트릭스에 하고 있는 일들을 넣어보자. 오늘 할 일은 생각보다 별로 없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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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에게 15시간이 주어진다면, 가장 필요한 일만 하기 위해 그 15시간이 사용될지도 모르겠다.



모두 적당히 일하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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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 당시에는 기계가 생산 일을 대체하고, 수많은 화이트칼라 사무직을 만들어내면서 노동시간을 유지했지만 결국 그 화이트칼라 사무직들이 하는 일이란 실제로 뭔가를 생산하기보다는 뭔가를 관리하는 일이다. 이미 우리는 직접 생산하지 않고 있고, 그 관리마저도 곧 AI에게 넘기게 생겼다.


AI에 직업을 빼앗기는 것을 대부분 위기로 받아들이지만, 가짜노동 상태를 일단 자각하고 나면 돈을 벌기 위해 무의미한 일을 하는 걸 멈추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주 40시간씩 직장에서 보내지 않고도 지금 같은 생산성이 유지되고, 적절한 분배가 이뤄진다면 노동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정말 원하는 일을 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취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수능을 보고 대입을 하는 대신 창조적인 취미활동이나 자연과학 연구를 하면 경쟁적으로 화이트칼라 사무직 근로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언젠가 PM이 아닐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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