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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진 Apr 17. 2023

김신영 인터뷰

올해로 11년째 12~2시를 책임지는 < 정오의 희망곡 > DJ 김신영을 만났다. 팔이 불편해 보이길래 물으니 이제 막 < 전국노래자랑 >에서 유도 시연을 하다가 다친 어깨의 깁스를 풀었다고 했다. 걱정 어린 눈길에 대답 대신 멋쩍은 웃음이 돌아온다. 말로 천하를 호령하는 기세보단 얇은 막 같은 긴장이 서린 첫인상이었다. 그는 “낯을 가린다”고 했다.

 

‘낯’은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민낯’ 같았다. 힘들었던 어린 시절 할머니와 아버지 곁을 오가며 이사만 60번을 다니고, 때로는 비닐하우스에서 지내며 혼자 키웠을 외로움의 감정. 생의 고단함을 일찍 겪을수록 빨리 찾아오는 게 사람과의 거리두기, 즉 낯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그는 그 영겁의 경험을 동력 삼아 일등 코미디언이, MC가, DJ가 또 때로는 연기자가 됐다. 그는 자신을 “결핍에서 시작한 사람”이라고 했다. 결핍. “행님아”를 외치던 152cm의 22살 청년이 “전국”을 외치는 41살이 됐다. 그사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악착같이 음악과 웃음 곁을 좇은 김신영. 그와의 대화를 시작해본다.



요새 스케줄이 어떻게 되나?
 
< 전국노래자랑 >이 농사와 비슷하다. 엄청 더울 때는 안 하고, 엄청 추울 때는 또 안 나간다. 날씨가 좋은 날 한 번에 몰아서 (촬영을) 하는데, 4월에 녹화가 9개 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꽃피고 날씨 좋고 할 때. 4~6월까지 바쁘다.

 

< 전국노래자랑 >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됐나. 방송에 적응은 좀 됐나?
 
이제 거의 6개월쯤 됐다. 적응이라기보단 여전히 배우는 단계다. < 전국노래자랑 > 자체가 1980년대에 시작된 프로그램이고 송해 선생님이 30년 진행하셨는데, 6개월이면 오프닝 수준 아닌가. (웃음) 아직 워밍업 단계다. 


또, 보통 방송 가면 진행 큐 카드나 프롬프트가 있다. 근데 < 전국노래자랑 >은 그게 없다. 아예 없다. 생라이브. 전날 4시나 늦으면 8시에, 19페이지 분량의 대본이 나온다. 처음에는 부담이 많이 됐다. 그래서 필사를 했다. 대본을 깜지쓰듯 다 적어가며 새벽까지 외운다. 소설책처럼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고 리허설에 참여하고 있다.

 

사실상 올인을 해야 하는 건데.

그렇다. 그래도 행복하다. 하길 정말 잘했다.

 

왜 김신영이 < 전국노래자랑 >의 새 MC가 된 것 같나?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어렸을 때 이사도 60번 넘게 다녔다. 그 덕에 여러 고장의 사투리를 잘 안다. 또 음악을 좋아하기도 하고... 가장 중요한 건 내가 < 정오의 희망곡(이하 ‘정희’) >만 11년째다. 성실함. 라디오는 매일 움직여야 한다. < 전국노래자랑 >도 성실하지 않으면 힘들다. 그런 면을 높게 봐준 것 같다.

 

인상과는 달리 낯을 가리는 편이라고. 진행할 때 어려운 점이 있을 것도 같은데.

성격이 낯을 가린다고 일은 안 하는 건 아니다. 각자마다 성향과 성격이 다 있다. 하지만 일을 하는 사람인데 내 성격대로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프로’이지 않나. 내성적인 성격은 라디오나 팬 미팅 같은 거 보면서 많이 나아졌다. 보통 여성 코미디언들이 지역 축제 사회를 잘 안 보는 편인데 나는 레크레이션 자격증을 따고 행사도 많이 다녔다. ‘10년은 무조건 배우는 시기다’ 했다.


더불어 < 전국노래자랑 > 같은 경우에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다. 참가자들이 주인공이다. 나는 그들이 최대한 스트레스 안 받고 긴장 안 하게 도와주는 역할일 뿐이다. 현장 가면 내가 그런 말을 한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내려가시라고. 여러분이 주인공이라고. 다 받아 드리겠다고.


 

올해로 방송 11년 차에 접어든 < 정희 > 또한 김신영의 큰 궤적이다.

내게 < 정희 >는 삶이다. < 정희 >에는 정선희 선배가 DJ 했을 때 게스트로 처음 출연했다. 내가 난독증이 좀 있다. 코미디는 3분 힘써서 하고 나가면 끝인데, 라디오는 말에 귀 기울이니까 처음에 너무 힘들었다. 정선희 선배가 ‘신영아, 넌 잘할 수 있어. 넌 재주 있는 애야. 포기하지 마. 넌 게스트도 할 수 있고 DJ도 할 수 있어’ 하면서 계속 다독여줬다. ‘00시에 사는 A씨 사연입니다’를 못했다. 순간 겁먹으면 글이 다 날아다녔으니.


< 정희 >가 한 달간의 시간을 준 유일한 매체였다. 그 시간 동안 읽고 말하는 걸 계속 연습했다. 그러면서 자신감이 붙고 다른 데 9개 고정 게스트를 했다. 슬슬 소문이 돌면서 < 심심타파 > DJ가 됐다. 내가 생각보다 참 많이 돌아서 온 아이다. 낯을 가리니까. 예능도 4년 동안 통편집됐었고.

 

음악을 좋아하는 걸로 잘 알려져 있다. 음악은 언제부터 좋아했던 건가?

나는 때로는 할머니 손에 또 때로는 아빠 손에 컸다. 두 분이 음악을 좋아했다. 할머니들은 또 음률을 넣으면서 말을 하지 않나. ‘머얼 먹으면 자알 먹었다고 소문이 나알까나~’. 사실 이게 음악이다. (웃음) 할머니가 김상국의 ‘쥐구멍에도 볕들날 있다’ 같은 옛날 노래도 많이 불러줬다. 아버지는 포크송을 좋아했다. (몇 년생이냐고 물으니) 1955년생. 당시 그룹사운드 음악들, 밴드 이글스, 김광석이나 김현식, 송골매 이전 활주로 시절 노래들. 또 대학가요제 음악도 많이 들었고.


마그마의 ‘해야’도 좋아한다. 보컬이 조하문씨인데. ‘해야’가 가사를 또 시에서 가져온 거다. 옛 표현들이 참 아름답다. 가사가 수필, 시 이런 느낌이다. 쌓다가 부수고 느낌도 있고. 유상록 ‘해운대 연가’의 한 구절인 ‘푸른 물결 춤을 추고, 물새 날아드는 해운대의 밤은 (…) 솔밭길 걷던 우리들의 사랑 얘기가 파도에 밀려 사라지네’에는 누구에게나 다 있는 10~20대가 그려진다. 그런 걸 담아낸 음악들이 좋다.

 

라디오 DJ로서 옛 음악을 많이 아는 건 확실한 강점이다.

그래서 난 우리 방송에서 임병수의 ‘아이스크림 사랑’을 엄청 많이 틀었다. DJ는 디스크자키니까.

 

자라면서 할머니나 아버지의 음악적 영향을 놓치지 않고 받은 것도 한몫한 것 같다.

가난해서 그랬다. 학원에 다니지도 않았고…. 음악은 내 힘듦을 달래 줬고, 꿈을 꾸고 키우게 해줬고, 또 어떨 때는 같이 울어주던 존재다.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럴 때 ‘노동요’가 짱이다. 음악은 위로인 것 같다. 양희은 선생님이 그러더라. 결핍이 많은 애들이 음악을 좋아한다고. 코미디언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여러 부류의 코미디언이 있겠지만 어렸을 때 웃을 일이 없거나 내가 웃는 거를 못 보면 다른 곳에 가서 그 웃는 걸 찾고 싶어진다. 그게 사실 결핍인데. 나는 그 결핍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 (활동에) 충족이 많이 된다. 충전되는 느낌이고. 



데뷔 20년 차 김신영 엔터테인먼트 역사에 있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예원예술대학교 코미디 연기학과에 붙었을 때. 코미디 관련된 대학이 대한민국에 딱 거기 하나밖에 없다. 전유성 교수님이 있었는데, 시험문제 4번이 아직도 기억난다. 혜화역 4번 출구에서 애국가 부르기. 얼마나 창피했는지. 내가 이 과를 왜 들어와서… (웃음) 또 이게 뭐야 했던 건 지하철에서 물건 팔기. 부딪혀 보라는 의미였던 것 같다.


두 번째는 대학교 축제 때 연극했던 것. 그때 했던 연극이 01학번 선배가 만든 < 신데렐라 콤플렉스 >이다. 여기서 참 많은 걸 배웠다. 나에 대한 확신. 내가 무대 위에서 즐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행님아(김신영이 했던 대표 개그 코너)’도 할 수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행복은 벚꽃 같다. 벚꽃이 피길 기다리다가 막상 피면 감흥이 없다. 근데 지면 또 그때부터 그리워한다. 기다리는 거다. 행복은 지나 봐야 아는 거지. 돌아봤을 때. 내가 살아 있다고 느꼈던 건 작년 말 < 전국노래자랑 > 연말 결산 때였다. MC 시작하고 2개월쯤 됐을 때 ‘설 특집 1020’을 하게 됐다. 내가 다른 건 웬만해서 다 해봤다. 근데 이거는… 연말 결산 끝나고 나니까 땀이 쫙 나더라. ‘오랜만에 땀 뺐다. 이걸 혼자 해냈다’ 싶었다. 막걸리를 한잔 딱 마셨는데 뜨거운 기운이 다리까지 퍼지는 느낌에 막 희열이 들었다. 


그는 스스로를 눈물도 없고 무뚝뚝한 사람이라고 했다. 겉이 두껍다고 하여, 속까지 딱딱하지는 않다. 유난히 고달팠던 어린 시절을 달래준 ‘행복의 나라로’를 < 전국노래자랑 > 첫 방송에서 양희은과 부를 때, 감춰뒀던 그간의 상처, 외로움, 기쁨, 희열이 한 데 뭉쳐져 울상이 되고, 무대에 오른 한 퇴직 광부의 무덤덤한 사랑 고백에 울컥하는 사람. 그에게서는 느껴본 자만이 맡을 수 있는 인간의 냄새가 났다.

 

텔레마케터, 신문, 음료 배달 등 안 해본 일 없이 열심히 산 그에게 ‘입담’은 가난이자 결핍이고, 상처이자 선물이었다. 라디오에서 돈도 못 받고, 도리어 잔뜩 욕만 먹은 청취자의 일화가 전파를 탈 때 엉엉 울 틈을 내주는 사람. 그리곤 다음 날 다시 그 벨을 누르라고 용기와 힘을 주는 사람. 눈물이 쓰고 짠 것을 아는 자만이 지닌 넉넉한 유쾌함이 그의 단어 하나하나에서 새어 나왔다.

 

반대로 너무 힘들었던 때가 있다면.

괴로운 건 뭐 눈 뜨면 괴롭다. 내 멋대로 사는 인생이 어디 있겠나. 그래도 가장 괴로우면서 나한테 득이 됐던 건 2012년 공황장애가 터졌을 때. 하늘 높을 줄 모르고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구나를 느꼈던 김신영에게 갑자기 공황장애가 찾아왔다. 12월부터 3개월을 꼬박 쉬었다. 엘리베이터도 못 타고 집에서도 계속 발작하고.


그때 전유성 교수님이 이런 얘기를 하더라 ‘축하한다. 너는 득도를 할 꺼야. 너에 대해서 진짜 공부를 이제부터 시작하는 거지’ 그래서 내가 ‘아무리 그래도 나는 지금 죽을 것 같다. 밥을 먹어도 갑자기 갑자기 그러니까…’ 했더니 ‘그러니까! 인생이 갑자기 갑자기인데 너가 계속 갑자기 발작이 오는 건 네가 너를 너무 몰라서 그래. 앞만 보지 마. 일단 너를 보고 나서 앞을 봐야지. 낭떠러지가 있는데 앞만 보고 걸어봐라. 너 죽는 거야. 축하한다’ 그러는데 기분이 팍 상했다. (웃음)


내가 남에 대해서 공감 능력이 부족했다. 예능 나가서 한 세 번 크게 웃기고 ‘그래 김신영이다’라는 얘기 듣고 살아야지 욕심냈다면 공황장애가 딱 터지고 나서 바로 고꾸라졌다. 방송을 못 하고 2~3년은 힘들었지.

 

그런데?

그런데. < 정희 >에서 기다려 주겠다고 했다. 사실 다른 방송에서는 다 잘렸다. 예능이 얼마나 빨리 돌아가는 곳인데 그거를 기다려주나. 그런데 또 KBS 심미진 PD한테 연락이 왔다. < 인간의 조건 여자편 >을 할 건데 내가 하면 하고, 내가 안 하면 안 한다고. 언제쯤 낫느냐고. 6개월 정도 인지 행동 치료 같은 거 필요하다고 하니까 기다리겠다고 했다. 방송국에서 기다려준다는 건 없는 일이지 않나. 그런데 참 많은 분이 기다려줬고, 그래서 더 감사하다. 책임감이 많이 든다.


사람들이 내 목소리 하나에 즐겁고 웃고, 사연도 보내고 한다. 또 < 전국노래자랑 >가서 ‘여러분 손 머리 위로’ 하면 모두가 다 손을 머리 위로 든다. 이게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지금 오른팔을 다쳤는데, 무대에 있으면 아픈 게 없다. 이번에 영도에 가서 내가 그랬다. 지금 박수를 너무 치고 싶은데, 왼팔밖에 없으니 여러분들이 내 오른팔이 돼 달라고. 박수 많이 쳐달라고. 그러고 나서 ‘전국’ 했을 때 돌아오는 ‘노래자랑’ 소리. 소름 돋고 행복하다. 사람들이 웃는 순간순간이 다 나한테는 행복이고 기쁨이다.


*김신영이 꼽은 나에게 울림을 준 노래 BEST 5


1. 엘튼 존 ‘Crocodile Rock’

공황장애가 터지고 아무것도 못 하고 있을 때 엘튼 존이 엘리자베스 2세 즉위 60주년 콘서트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걸 봤다.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나더라. 부러운 게 아니고, 내가 평생 이런 무대를 해봐야지 싶었다. 음악으로 하나가 되는. 그때 기억과 그 울림이 아직도 여기 남아 있다.


2. 양희은 ‘행복의 나라로’

원래는 한대수 선생님의 곡인데, 나는 양희은 선생님이 부른 버전을 더 많이 들었다. 고등학생 때 금니를 했는데 그때 치과 가는 게 그렇게 무섭더라. 다 큰 손주가 무섭다고 하니까 외할머니가 나랑 같이 병원에 가줬다. 같이 가서 앉아있는데 라디오에서 이 곡이 나왔다. 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아주면서 귀에 대고 이 노래를 불러줬다.


3. 김현식 ‘추억 만들기’

모르겠다. 그냥 이 노래가 너무 좋다. 울고 싶을 때는 이 노래를 많이 틀고 울었다. 


4.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

우리나라 음악의 판도를 바꿔놨다. 동시에 내 음악 취향도 많이 바꿔 놨고. 어릴 때 오빠랑 둘이 엄청나게 연습하고 그랬다.


5. 셀럽파이브 ‘셀럽이 되고 싶어’

일본 여고생 댄스팀 TDC의 영상을 한 만 번쯤 보고 무턱대고 일본으로 갔다. 우여곡절 끝에 아카네 코치를 만나서 허락받았다. 바로 송은이 선배한테 전화해서 ‘허락 맡은 게 있는데 정말 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한 프로젝트다.


고등학교 때 내가 중늙이었다면, 이때의 내가 진짜 고등학생 같다. 35살 전까지는 그냥 나 이렇게 예능 하다가 죽을 사람인가보다 생각했지 이렇게 머리 속에 있는 걸 기획할 수 있는 사람인지 몰랐다. 


단체복 원단 고르는 것부터 개사까지 다 직접 했다. 셀럽 파이브 활동을 통해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구나 느꼈다. 이게 되는구나. 내 자신감을 높여줬던 시기라 내게는 굉장히 뜻깊은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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