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안다고 생각했던 오랜 친구
만남의 시간이 오래되었다고
그 친구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했다.
영국에서 마지막 날, 일어날 때부터 몸이 찌뿌둥해서 어제 많이 걸었던 탓인가 했더니 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고 오후 5시에 파리로 향하는 유로스타를 타러 가야 하기 때문에 영국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조금 빡빡했다. 우선 앨리펀트 앤 캐슬 역에 가서 오이스터 카드에 유로를 충전하는데 이때부터 일이 발생했다.
한국에서 발급받은 카드가 비밀번호 연속 4번 오류로 인해 락(locked)이 걸려버린 것이다. 영국에서 사용할 파운드 외에 다른 국가에서는 유로를 사용해서 환전을 하지 않고 카드에 모든 여행 경비를 입금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앞으로 일정에 많은 차질이 있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신경이 날카로워질 때로 날카로워진 나는 국제전화 비용과 상관없이 해당 카드사에 문의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국내에 돌아와서 문제를 처리할 수 있다는 무책임한 대답뿐이었다. 그때부터 마음 상태가 스스로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친구가 카드를 준비해 놓아서 우선 일정을 진행할 수는 있었지만 친구는 파리에서 먼저 아웃을 할 예정이고 나는 스페인에서 조금 더 지내다 귀국하는 일정이라 나의 불안감은 더욱 높아졌다.
가늘었던 빗방울들이 조금씩 굵어지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있는 며칠 동안 날씨가 좋았기 때문에 금방 날이 개일 거라는 예상으로 우산을 캐리어에 놓고 왔던 것도 문제였다. 카드가 막혀 마음이 좋지 않은 나는 그런 감정들이 친구에게 표현되고 우산을 같이 쓰자는 친구의 말에도 대충 대답을 하고 그냥 내 갈길을 걸어갔다. 근위대 교대식을 보기 위해 버킹엄 궁전으로 향하는 길에 빗방울은 더욱 거세졌고 근위대 교대식은 수많은 우산에 가려져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에스미럴티 아치를 지나 잠시 카드의 사용 여부를 다시 확인해 보기 위해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감정의 상태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고 친구는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냐고 물었다. 사실 내가 민감해진 이유는 카드가 락이 걸려 버린 것 때문이 가장 컸지만 내색하지 않은 다른 한 가지가 있었는데 바로 여행을 함께하고 있는 친구에게 서운한 마음이 있었다.
여행 전 바쁜 친구 대신 영국행 일정을 친구 C의 도움으로 겨우 겨우 세울 수 있었고 하루하루 여행 시작 전 그날의 일정을 친구에게 이야기하면서 의견을 조율해 나갔다. 그래도 여행 전 계획을 세워놓고 여러 여행 블로그나 여행사진을 보면서 우리가 가야 할 곳에 대한 간단한 공부와 이동 간에 필요한 교통 등에 대해 나름대로 알아본 상태였지만 일정을 이야기할 때면 항상 친구는 "이게 가능할까? 힘들겠는데? 어렵다."라는 말들로 나의 계획에 대해 동의를 하지 않았었다.(친구의 성격을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여자 친구와 함께 카페에 가서 딱 한잔의 커피만 시켜야 하는 상황이라면 자신이 마시고 싶은 아메리카노를 선택해야 하는 친구이다. - 친구가 나에게 해준 말이니 오해는 없길 바란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결국 그날 숙소에 돌아와서 지난 일정들을 생각해 보면 내가 처음 이야기해주었던 계획대로 다 진행이 되었기 때문에 섭섭한 감정들이 조금씩 쌓여갔다. 비를 쫄딱 맞고 마음도 상한 상태에서 함께 점심을 먹으며 친구에게 이런 감정들을 토해내듯이 쏟아냈다.
나 : 아마 친구 B가 함께 와서 이런 일들이 있었으면 너희 둘이 많이 싸웠을 것 같다.
친구 : 아니, 친구 B는 그때그때 나에게 사실대로 감정들을 이야기했을 거야.
나는 아무리 화가 나거나 부당한 일이 있어도 그 순간 인내하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니다 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남에게 나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장점일 수도 있겠지만 단점일 수도 있다는 것을 친구와의 여행을 통해 알게 되었고 중학교 때부터 함께 지내온 오래된 친구에 대해 내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생각도 착각이었다. 짧은 대화였지만 속이 시원했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해준 친구에게 고마웠다. 조금 민감했던 감정들이 차분함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카드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내셔널 갤러리에 들어가기 전 다시 해당 은행사에 전화를 해보니 매장에서 카드를 바로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ATM 기계에서 인출을 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수수료는 그때그때 환율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앞으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아침부터 비를 맞고 카드가 막히고 친구에게 서운한 감정까지 겹쳐 민감한 상태였지만 친구와의 대화 이후 많은 것들이 해결되었다. 그래 사실 정말 쉬운 일들인데 처음 접해 보는 상황에 당황하고 민감하게 반응했던 자신을 볼 수 있었다.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쉬며 트라팔가 광장을 바라보니 템즈강 쪽부터 날이 조금씩 맑아지고 있었다.
내셔널 갤러리 관람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 짐을 챙겨 킹스크로스 역으로 가기 전에 어제 마시지 못했던 눈물의 몬모스 커피를 마시러 다시 버로우 마켓으로 향했고 다행히도 몬모스 커피 앞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커피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장은 작았지만 커피 향기와 빵 향기로 가득 찼고 하루 종일 비를 맞았던 나에게는 더욱 따뜻하게 다가왔고 핸드드립으로 내려주는 커피의 사이즈는 아주 작았지만 많은 문제들이 해결된 후 마시는 커피 한잔은 정말 런던 여행의 긴장감과 피로를 싹 풀어주는 느낌이었다. 너무 맛이 있어서 눈물을 흘리고
싶었지만 양이 적어 눈물이 맺힐때 쯤 이미 잔은 비워졌다.
기차 시간에 맞춰 서둘러 버스를 타고 킹스크로스 역으로 향하는 버스 이층 제일 앞자리에 앉아 짧은 런던 일정 동안 걷고 또 걸었던 곳들을 지나쳤다. 머릿속에 지도가 그려질 만큼 많이 돌아다니고 경험해 보았던 런던의 거리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아두며 파리로 향했다.
런던에서 느꼈던
여행에 대한, 친구에 대한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묘한 감정들
이제는 또 새로운 시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일러스트레이터 김병조는 2014년 9월, 잘 다니던 광고 기획사 아트디렉터 일을 그만두고 무작정 유럽여행을 다녀온 후, 앞으로 내가 뭘 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다시 취직을 할 것인가? “VS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인가?”라는 고민으로 몇 날 며칠을 보내다 복잡한 마음을 잡기 위해 유럽여행에서 촬영한 사진을 무작정 펜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 동안 마음이 편안했고 내가 직접 두 발로 걷고 느꼈던 유럽의 모습을 일러스트로 담아내는 작업이 참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여행을 통해 느끼는 감정과 기억을 일러스트로 공유한다면 조금 더 특별할 거라는 생각으로 프로젝트를 구상하기 시작했고 2015년 1월부터 <월간 일러스트 프로젝 트>라는 이름으로 하루에 1장씩 공유받은 사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Profile
2015년 - A Little Memory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 시작
2015년 7월 - 1st. SOLO Exhibition / 삼청동 ‘카페온리’
2016년 1월 - PENVAS ‘당신의 작품을 겁니다’ - ‘문화공간 이목’
2016년 2월 - ‘Sponsored by me’ interview
2016년 3월 - ‘NIXON_Waste No Time’ interview
2016년 7월 - ‘2016서울일러스트레이션페어’ 참가
2016년 8월 - 3rd. Exhibition / 컬쳐클럽아시아 x 갤러리서울 ‘WHAT ARE YOU DIONG NOW’ 전시
2016년 10월 - 2nd. SOLO Exhibition / 삼청동 ‘카페온리’
2016년 10월 ~ 2018(현재) - 홍대 ‘공간630’ 정규수업 강의
2016년 11월 - 8th Italian Film & Art Festival 초대 전시
2016년 12월 ~ 2017(현재) - 현대백화점 문화센터 강의
2017년 7월 - versakrum Magazine interview
2017년 7월 - 하늘사이 미술전 - "익숙하고 낯선" - 은평문화 예술회관 전시
2017년 9월 - PWAC 소속 대표 일러스트레이터
2017년 9월 - iDEA group 한국 지사, 총괄 디자이너(디자인 실장)
2017년 10월 - 김병조와 작은기억 모음전_수강생 전시
2017년 10월 - ‘성수작가전 - 작가의 방’ 전시
2017년 12월 - 2018년 2월 - 경기도 소다미술관 "Welcom to my home" 기획 전시
2018년 2월 - PWAC x MANSOLE x LOTTE - "MANSOLE GOLD MINE" 팝업스토어 진행 - 롯데월드 몰
인스타그램 : a_littlememory
블로그 : blog.naver.com/alm_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