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미니시리즈 '그리고 베를린에서'가 전하는 정상성의 폭력
*넷플릭스 오리지널 '그리고 베를린' 작품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너는 도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대한민국에서 성장과정을 거쳐 온 우리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대사다. 선생님으로부터, 부모님으로부터,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친구나 연인으로부터 등등 이 대사를 던지는 주체는 다양하다. 반대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이러한 대사를 던진 경험도 있을 것이다. 대개는 한숨과 한심하다는 눈빛이 뒤따른다. 명분은 '내가 너를 아끼기 때문에 너 잘 되라고 하는 소리'다. 상황은 누군가 '정상'적이지 않은 행동을 했을 때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사회가 규정하는 '정상'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고, 그 가치는 매우 높다. 12년 간의 숨막히는 교육과정 끝에는 '명문대 입학'이, 대학에서 피터지는 스펙 경쟁 끝에는 '좋은 기업 입사'라는 트랙이 깔려있다. 우리는 처음 만나는 20대 초반의 아무개에게 "대학생?"이라는 질문을, 20대 중후반에게는 "직장인?"이라는 질문을 던지기에 익숙하다. 그 후속 질문에는 "어디?"라는 '타이틀 묻기'가 뒤따른다. 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얼마나 정상적으로 이 사회의 룰을 따라서 성실하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증명이다. 그리고 조금은 다른 길을 선택한 사람들은 '내가 대학에 가지 않은 이유', '내가 취직을 하지 않은 이유' 등을 소명해야한다. 그 이유들이 타당하지 않아 사회가 제시하는 정상의 궤도에서 벗어났다고 판단될 때, '낙오자', '어딘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낙인찍기로 이어진다. 누군가는 이러한 현상을 우리 사회에서 '지극히 정상'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나는 '정상성의 폭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예시는 교육과 직업을 기준으로만 들었는데, 사실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러한 '정상성의 폭력'이 엄격하게 작동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미니시리즈 '그리고 베를린(Unorthodox)'은 정상성의 폭력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아마도 오늘날 이 작품을 시청한 대다수는 정통주의 유대교리를 따르는 뉴욕의 '하시디즘 공동체'가 굉장히 잘못됐다고 생각할 것이다. 폐쇄적인 하시디즘 공동체의 문화는 대한민국 국민의 시각에서 21세기에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레디 율법이 정의하는 여성 삶의 목적은 오직 출산이다.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로 인해 생명을 잃은 600만 유대인을 복원한다는 명분이다. 그래서 여성은 교육을 받을 수도, 탈무드를 읽을 수도, 직업을 가질 수도 없다. 이른 나이에 이루어지는 중매 결혼은 출산을 위한 수단이며, 남편을 만족시키기 위한 '일방적' 섹스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임신을 위해 의무적인 섹스를 한다. 이는 이들 공동체에서는 '신의 뜻을 따라'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섹스를 통한 임신, 그리고 출산을 하지 못하는 여성은 '비정상'으로 취급받는다.
여주인공 에스티는 중매 결혼을 위해 그의 배우자 얀키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자신이 '다른 여성들과는 다르다'고 소개한다. 이는 에스티가 공동체를 탈출하는 복선으로 작용하지만, 사실 그가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은 오히려 공동체에 순응하는 쪽이다. 공동체 내에서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에스티가 몰래 피아노를 배운다는 점과 태어날 때부터 '비정상'일 것이라 낙인이 찍현다는 점 정도다. 에스티는 고아다. 그의 어머니는 에스티보다 앞서 공동체를 탈출했는데, 사람들로부터 '미친년', '배신자' 혹은 '변절자'로 취급받는다.
에스티는 정상으로 인정받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 그는 결혼 생활이 행복할 것이라는 어느 정도의 기대와 얀키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 그는 율법이 정하는 절차를 준수해 결혼하고, 삭발을 하고, 섹스 교육을 충실히 받는다. 에스티의 나이는 고작 17~19살이다. 그에게 섹스는 아프다. 그럼에도 그는 임신을 해서 인정을 받기 위해 '일방적으로' 노력한다. 얀키의 어머니와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불임의 책임은 전적으로 에스티에게 부담된다. 그리고 에스티는 임신에 성공한다. 정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기쁜 마음으로 얀키에게 그 소식을 전하려는 날, 얀키는 에스티에게 이혼을 제안한다. 그렇게 에스티는 공동체와의 결별을, 미친년이 되기를, 외부로의 탈출을 결심한다. 조력자는 역시 '미친년'이자 '이단'으로 취급받는 피아노 선생님이다.
그렇게 에스티는 베를린으로 향한다. 베를린이라는 도시에 붙는 수식어는 '자유'다. 다양한 악기가 모여 하모니를 이루는 오케스트라처럼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매력을 뽐내는 도시다. 그 곳에서 에스티는 더 이상 비정상도, 미친년도 아니다. 에스티가 만나는 베를리너들은 그녀를 선입견 없이 바라봐준다. 베를린에서는 특별히 '이래야 정상'이라는 기준은 제시되지 않는다. 또한 하시디즘 공동체의 폭력성에 대해서 말해준다. 그럼에도 하시디즘에 속해 오랜 교육을 받은 에스티는 때때로 자신이 속했던 공동체를 방어한다. 에스티의 신체에 대한 자유의지에 따라 '낙태'를 할 수 있다는 선택지를 주는 의사 앞에서는 당황한다. 임신과 출산은 오랫동안 그의 삶의 목적이자 정상에 대한 기준이자 가장 중요한 가치였기 때문이다.
베를린을 경험하면서 서서히 베를리너가 되어감에 따라 에스티는 변화한다. 그리고 에스티를 추격하던 그의 남편 얀키도 충격을 받는다. 외부세계를 한 번도 경험해 본적이 없는 그들에게 베를린은 충격이다. 정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것들이 사실은 비정상이었음을, 자신들의 폐쇄적인 공동체가 내재한 '정상성에 대한 폭력'과 강요를 마주한다. 정상성은 이토록 상대적이다. 그럼에도 정상성에 대한 올바름과 그렇지 않음은 명확히 존재한다.
"너의 삶을 선택할 권리가 주어진다면, 하시디즘 공동체를 택할래 베를린을 택할래?"라는 질문으로 답은 쉽게 나온다. 하시디즘 공동체 사람들에게는 달리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으니, 이 질문을 애초에 조금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다.
에스티는 베를린에서 만난 조력자 로버트와 키스를 하고 함께 침대에서 잠을 잔다. 에스티가 먼저 키스를 하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지금까지 폭력적인 섹스에 감춰졌던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권리, 성적 자기결정권의 발현이다.
이 작품이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개인의 삶에 대한 폭력과 강요로 얼룩진 사회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미쳐야한다. 미친 것이 되는 선택은, 사실은 폭력으로부터 자신의 삶과 행복을 지키는 용기임을, 정상성의 폭력에 가려진 진짜 비정상이 무엇인지 깨달아 변화하는 과정임을 인식해야 한다. 나는 자신의 머리를 잘라낸 얀키가 하시디즘 공동체로 돌아갔을 때, 미친놈이 되기를, 완전히 미친놈 취급을 받기를 응원하고 싶다. 그것이 에스티를 위해 할 수 있는 그의 유일한 속죄일 것이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최소한 스스로는 그렇게 칭한다.
대한민국에서 결혼, 임신과 출산은 법으로 정해져 있지도, 의무 사항도 아니다. 다만 이 3가지를 행하지 않는 이들은 여전히 비정상 혹은 미친 것 취급을 받는다. '정상성의 폭력'이 작용한다.
2016년 12월, 대한민국 행정자치부는 저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전국 243개의 자치단체의 출산통계를 담은 '출산 지도'를 공개한다. 그리고 그 지도에는 가임기(15~49세) 여성분포도가 포함된다. 이는 가임기 여성을 출산을 위한 도구 혹은 수단으로 왜곡할뿐만 아니라 저출산의 원인과 해법을 가임기 여성에서 찾는 접근이다. 우리사회는 결코 하시디즘 공동체를 욕할 자격이 없다. 그래서 한심한 'N포 세대'라고 불리는 우리는 미쳐야 한다. 개인의 삶과 행복을 정상성의 폭력으로부터 구원하는 길이라면, 우리는 미친놈이 되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한다. 정상성의 상상과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제는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