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극히 주관적이었던 나
예전에 나는 이성을 만날 때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었다. 담배를 피우는 여자가 싫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비합리적이고 꽉 막힌 생각이지만, 그 때 당시에는 나름 객관적이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담배 피는 여자를 싫어하는 이유는 크게 3가지였는데,
첫 번째는 내가 담배를 안 피니까.
두 번째는 담배 냄새가 싫어서.
세 번째는 여자가 담배를 피운다는 건 사회적 가치에 배반하는 행동이라서.
그러다 우연히 지인 모임에서 정말 괜찮은 여성분을 보게 됐다. 외모도 뛰어나셨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배려하는 태도가 습관처럼 자리잡은 분이었다.
그 분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던 중 그 분이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혹시 담배 피세요?'
순간 흠칫 했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말씀드렸다. '아니요. 피우진 않습니다.'
그러자 그 분은 웃으며 '혹시 제가 잠깐 나가서 담배를 필 건데, 같이 나가실래요? 대화가 재밌어서 흐름이 안 끊겼으면 좋겠어서요.'
그 때 알았다. 내 기준은 굉장히 편협하고 단순했다는 걸.
예전같았으면 무례나 오만으로 치부했을법한 행동이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매력으로 다가왔고, 그토록 싫어했던 담배 냄새가 그 사람의 은은한 향과 어우러져 잔잔한 감동까지 줬다.
그 경험이 있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담배를 피워서 싫다'라고 생각했던 상대 여성분들은, 그 분들이 담배를 피워서 싫은 게 아니라 생각보다 훨씬 원초적인 이유로 내가 싫어했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것.
이를테면 동물적인 본능으로 느낄 수 있는 애매한 느낌이나, 유쾌하지 않았던 대화, 부정적인 에너지와 입에서 나는 좋지 않은 냄새 등.
그 상황에서 나는 몇 분, 아니 몇 초만에 '이 사람 아니다.'라는 판단을 동물적으로 내리게 된다.
그러나 그런 묘한 느낌을 얘기하기엔 내가 너무 재는 사람 같고 까다로운 사람 같으니, 사회적 통념에 의거한 '나름' 합리적인 이유를 만들어낸다.
설령 그 사람이 내가 너무 마음에 들어, 두 달 뒤 담배를 끊었다고 연락이 온다한들 나는 그 사람에게 큰 호감을 느끼진 못할 것이다.
상대방이 담배를 피워서 싫었던 게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나에게 그냥 그랬던 사람들이 담배를 피웠을 뿐이다.
그 이후로 누군가를 만날 때는 웬만하면 어떤 기준이나 선입견을 만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느끼려 노력하게 됐다.
나는 나를 잘 안다, 나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다, 나는 경우 있는 사람이며 배려 깊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며 어떠한 기준을 세워놓는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전에 가졌던 상대방을 만날때 세운 확고한 기준들이 내 소중한 시간이나 금전을 아끼는데 도움이 됐을지도 모르지만, 반대로 소중한 인연들을 만날 기회를 차단했을지도 모른다.
상대방이 좋은 싫든 그 이유를 '그럴듯한 사회적 가치'에 의거해 한 문장으로 정의하려하기보다는
그 사람 자체를 알아보려는 노력을 해보면 어떨까.
'그거 하더라고. 더 말할 필요도 없어.'라고 하기 보다는,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떻게 살아갈 건지에 중점을 맞춰 그 사람을 알아볼 노력을 해보면 어떨까.
예전에 뚜렷하고 단순했던 이상형에 대한 기준이 요즘은 없어진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사회적 가치는 불변의 사실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다수의 의견일 뿐, 내가 그 의견에 나를 애써 맞추거나 따라갈 필요는 없다.
우리는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