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하겠습니다"
말을 꺼내는 순간 아차 했다. 3년 차가 되어서도 신입 때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내 입을 막고 싶었다. 열심히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니?
디자이너로서 강점이 될 수 있는 능력은 수만 가지다. 글쓰기, 커뮤니케이션, 정리하는 능력, 구조화하는 능력, 트렌디한 감각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이나 성실은 디자이너의 강점이 된다고 믿은 적 없었다. 그런 건 신입 때나 유효한 거지. 경력직이 노력을 강조하는 건 실력 없어 보이잖아.
실력 있는 사람으로 보이려 애썼다. 외적으로 디자이너처럼 보이고 싶었다. 겉모습이 세련되면 왠지 디자인을 잘할 것처럼 느껴지니까. 바람과 달리 어떤 머리를 하건 옷을 입건 나의 촌스러움은 감춰지지 않았다. 또한 작은 디자인 작업이라도 맡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감각 있다는 이미지를 심어주려 버둥거렸다. 겉으로는 디자인은 예쁘게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비주얼 능력은 디자이너의 기본 소양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타인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 지부터 무서웠다.
얼마 전, 디자이너로서 나의 강점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성실함이라고 적었다. 디자이너와 성실함, 두 개의 단어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열심히 하지 말고 잘하라는 문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잘하는 사람은 아니다. 평범하기에 노력하는 사람이다. 이전까지 스스로에게 평범함이라는 단어를 붙일 때는 자기 비하에 가까웠다. 이번엔 그렇지 않다. 처음으로 반감 없이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였다. 예전에는 왜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지 못했을까. 인정하는 순간 쓸모없는 사람이 될까 무서웠던 걸까.
안 예쁘던 자식이 예뻐 보이는 부모처럼, 갑자기 내가 가진 성실함이라는 특성이 예뻐 보였다. 계속 변해가는 IT 업계에서 꾸준히 공부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장점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옷에 빠져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게 되면 서다. 나는 세련돼 보이는 것에 꽤나 집착했다. 유튜브 영상에서 '한 끗 차이로 세련되게 옷 잘 입는 방법' 같은 제목을 보면 바로 클릭했다. 여러 영상을 보니 세련되게 스타일링하는 핵심은 끊임없는 공부였다. 트렌드를 열심히 분석하면서 유행에 맞는 핏을 내고, 유행하는 아이템을 사고, 유행하는 느낌으로 옷을 조합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본 적 없고 들은 적 없는 사람이 마음대로 입었는데 세련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유행만 따라가는 것은 개성 없다 말하지만 유행을 잘 따라가기도 참 어려운 일이다. 유행을 이해하고 실제로 그 느낌을 잘 내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이제 부끄러워하지 않고 열심히 유행을 따라가야겠다. 주변에 옷 잘 입는 디자이너 친구들을 지금처럼 열심히 부러워해야겠다. 그리고 10년 차가 되어도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