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제5회 청년이야기대상 입선
그날은 유난히 밤샘 육아에 지친 날이었다. ‘백일의 기적’을 바랐지만 ‘백일의 기절’을 맛보았다. 차근차근 통잠 자기를 연습했던 딸은 백일이 다가오자 보란 듯이 신생아 때로 돌아갔다. 새벽에 두 시간마다 깨서 밥 먹이고, 달래고, 재우는 걸 반복했더니 남편이 출근한 것도 모른 체 오전 내내 기절상태였다.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거실로 나와보니 이미 오후의 햇살이 밀려오고 있었다. 안부를 묻는 남편의 문자에 오늘따라 정말 못 해 먹겠다고, 앞으로 내가 일 할 테니 당신이 애 보는 게 어떠냐며 마음에도 없는 거친 소리를 뱉어버렸다. 일단 정신부터 차려야겠다 싶어 어제 먹다 남은 커피를 찾았다.
그때였다. ‘띵동’ 문밖에 택배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택배가 올 일은 없는데 의아해하며 조그만 상자를 받아들었다. 보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해도 단번에 누군지 알아채지 못했다. 출산하면서 기억력까지 낳아 버린다는 친구들의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다. 포장을 뜯어 내용물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마그넷(냉장고 자석)이었다. 우리 집 거실엔 ‘마그넷 벽면’이라고 불리는 보물 같은 장소가 있다. 그간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며 하나씩 모은 마그넷 기념품을 전부 벽에 붙여 놓은 공간이다. 작년 여름, 나는 이 마그넷으로 재밌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저마다 소중한 추억이 담긴 마그넷을 나 혼자 감상하는 게 아까워 작은 박람회를 연 것이다. 여행을 좋아하고 마그넷 수집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소수 정예로 초대했다. 마그넷으로 처음 만났지만 우리는 여행 중 만난 인연들처럼 금세 가까워졌다. 바로 그때 참여했던 게스트 중 한 분이 따로 연락도 없이 깜짝 선물을 보낸 것이다.
상자 안에는 ‘라플란드’ 문구가 적힌 마그넷과 세계 최북단 맥도날드에서 발행한 오로라 엽서 그리고 핀란드산 초콜릿이 들어있었다. 엽서 뒷면은 작은 글씨로 빼곡히 채워졌다. 편지를 읽어보니 그녀는 이번 겨울에 유럽 북단의 라플란드라는 지역을 여행했고, 여행 기념품으로 마그넷을 사는데 내 생각이 나서 하나 더 골랐다고 했다. 작년 마그넷 프로젝트에서의 경험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고마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녀의 따뜻한 마음이 작은 상자에서 피어올랐다.
라플란드 마그넷을 벽면에 붙인 후 초콜릿을 깨물어보았다. ‘오독 오독 오도독’ 경쾌하고 또박또박한 소리가 거실에 퍼진다. 오독오독 소리는 조금씩 빨라졌고, 점점 라플란드로 들어가는 주문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눈을 감자 엽서에서 본 라플란드 풍경이 그대로 펼쳐졌다. 아무도 없는 새하얀 눈밭 위로 초록 빛깔만이 고요히 넘실거렸다. 차가운 적막 속에서 나는 빛의 운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새 거실 안쪽까지 햇살이 길게 들어와 노랗게 손톱을 물들였다. 꿈을 꾼 듯 라플란드를 다녀온 나는 다시 한국의 햇볕과 마주했다. 대상이 무엇이든 지나치게 한 곳에 매몰되어 있다면 잠깐이라도 숨 쉴 틈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육아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이를 돌보는 와중에도 조용히 나만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오후의 반짝이는 햇살도 내 마음에 틈이 없다면 들어올 수 없고, 내 일상을 빛나게 할 수 없다. 초콜릿을 오독오독 씹으면서 생겨난 작은 틈으로 나의 오후는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이런 순간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않을까.
때마침 잠에서 깬 딸은 나를 찾았다. 나는 버둥거리는 아기 천사에게로 가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인다. ‘지원아, 나중에 엄마랑 라플란드로 오로라 보러 갈까?’ 남편에게도 다시 문자를 끄적인다. ‘아까는 좀 정신이 없어서 그랬어. 아직 육아할 만한 것 같아. 오늘 저녁은 맛있는 거 해 먹을까? 올 때 고기 좀 사 오고.’ 나는 다시 내 일상을 사랑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