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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주 Feb 07. 2024

기억에 관하여

-온정 혹은 차가움

기억력 좋은 친구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중학교 때 지리 선생님이 우리한테 해준 얘기있잖아."

얼굴도 가물거리는 지리 선생님이 수많은 얘기를 했겠지만

도무지 한마디도 생각나지 않고 생각해낼 필요도 없을 일인데

그 친구는 늘 선명한 카드 한장을 꺼내 읽듯이 '그날'을 떠올렸다.

이게 인간인가,  AI인가 황당하지만

기억하는 만큼 추억거리도 차고 넘칠 그 친구가 간혹 부럽기도 했다.  


그나마 나에게 남아있는 기억이라곤 대체로 진땀나는 실수담이거나

기운 쑥 빠지는 실패담 같은 게 대부분이다.

물론 좌절하지 않고 비슷한 실패를 거듭할 수 있었던 건

천하에 빌어먹을 낙천적인 내 성격 덕분인 것이 그나마 천행이라고나 할까…


내 하찮은 기억은 그때가 언제였는지부터 가물거린다.

아주 오래 전 일이었다.

절친 중 하나였던 A를 떠올릴 때마다 생각나는 몇가지 에피소드 중에 하나는

당시 자주 술자리를 함께 하던 A와 두명의 인물(이니셜도 못쓸 만큼 기억 안나는 이름)까지

네명이 함께 서울에서 가까운 강원도 어디론가 갔던 1박 여행에 관한 거였다.

한달에 한 두번 회지 편집인지, 캠페인 관련 회의인지의 끝은 늘 술자리였고

고구마 처럼 답답하게 안 풀리던 문제들도 뒷풀이를 생각하면

일사천리로 진도를 빼곤 해서 회의 하면 술이 같이 떠오르던 시절이었다.

요즘 것들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흩어져버려 있던 정도 떨어질 판이다.  


그렇게 골방 회의 끝에 퀘퀘한 술집들을 돌아다니던 우리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도시탈출을 공모하여

작은 배낭을 하나씩 짊어지고는 시외버스를 탔다.  

별로 길지 않은 시간 끝에 당도한 작은 도시는

깡시골이 아닌지라 서울 변두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시외버스를 타고 내렸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우리는 이미 들떠 있었다.  


그리고 점심을 먹기 위해 터미널 주변의 골목을 들어서는데

갑자기 오토바이 하나가 우리 옆을 스쳐지나다 멈추더니 라이더가 한쪽으로 쓰러졌다.

세명은 왠지 관여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으나

오지랍 100단에 측은지심으로는 절대 지지않을 삶을 살아온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써 라이더에 다가가고 있었다.

시큼하게 땀냄새가 낭자한 남자는 배달업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는데

이거 뭐지? 싶을 정도로 가슴부분이 비정상적으로 뛰고 있었다.

심장이 분명한데 눈으로 보일 정도로 저렇게 뛴다고?

주저주저하며 옆으로 다가온 세명도 놀라서 한마디씩 건넸다.

"괜찮으세요?"

"아, 네. 제가 심장 수술을 했는데 가끔 이럴 때가 있거든요."

남자는 숨을 몰아쉬며 겨우 말을 이어갔다.

"얼른 병원에 가셔야 하는 거 아니예요?"

"네, 약을 먹으면 괜찮은데…"

"아니, 병원에 가셔야 할 것 같아요. 심장이 어떻게 이렇게 뛰죠?"

"아니요. 병원은 안가도 되고요. 약을 먹어야 하는데 제가 약을 안 가져와서."

"네? 무슨 약이에요? 제가 얼른 약국에 가서 사올께요."

"일반 약국에서는 안 팔아서 제가 알고 있는 약국에 가야 하는데 제가 지갑을 안 가져와서…"

"네? 얼마가 필요한데요?"

"6만원이에요."

"아, 네…"

"죄송하지만 6만원만 빌려주시면 나중에 부쳐드릴 수 있는데…"

"네? 네…"

난 이 사람은 6만원이 없으면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는 극 오지랍이 발동되어

이미 지갑을 열고 있었지만 안타깝게 6만원이 없었고

세명을 재촉하여 6만원을 만들었다.

이게 아마도 20년도 전 일이니 요즘 6만원의 2배는 되는 돈이었지 싶다.

"저희도 지갑에 돈이 별로 없어서요. 일단 6만원은 만들었으니 얼른 약국에 가보세요."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는 우리에게 계좌번호를 물어 적었는데

언뜻 보니 그 사이에 나대던 심장이 가라앉아 있었다.

라이더는 툭툭 털고 일어나 오토바이를 타고는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그가 돈을 받고 사라진 속도는

우리가 그의 고마움을 채 실감할 수 있는 속력을 능가한 것이어서

우리는 다시 '뭐지?' 하는 심정이 되었고

우리가 아니면 고귀한 생명 하나를 목전에서 놓칠지 모른다는 긴박감은

순식간에 허탈감으로 바뀌고 있었다.

서로를 멍하게 보고 있는데 한명이 입을 뗐다.

"우리 속은 거 아니야?"

"설마 자기 병을 무기로? 그리고 우리가 다같이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는 걸 봤잖아?"

"와~~~아무래도 이건 느낌이 쎄한데?"

"괜히 언니 오지랍 때문에 우리 돈만 뜯긴 거 아니야?"

"설마…..."

그 라이더의 심장에 대한 걱정과

사기를 당했을 수도 있다는 황당함과

아픈 사람을 괜히 의심하나 싶은 미안함이 한데 뒤섞여

그날 체한 듯 먹은 식사와 알코올이 일으킨 화학반응은 가스로 변성되었고

밤새 방귀를 참느라 고역을 치른 그날 밤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악몽이 되고 말았다.

 

결국 그는 돈을 보내오지 않았고, 우린 털렸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심장을 그렇게 뛰게 만드는 것 까지 사기였다고?

그건 아니겠지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찜찜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 뒤로 그는 성공한 사기에 쾌재를 불렀을 지,

고마운 온정 덕분에 나대는 심장을 약으로 잘 다스렸을 지

결코 우리가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그가 병으로부터도, 사기로부터도 자유로운 삶을 잘 살고 있기를 기원한다.  

-----


상태가 너무 악화되어 다시 폐쇄병동에 입원해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던 동생은

딸과 주말을 한번 같이 보내더니 많이 안정이 되었고 증세가 다소 나아져 있었다.

2주만에 보니 언제 그랬나 싶게 반가운 마음이 되어 난 또 한없이 살가워져 버렸다.

이렇게라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라도 나아지면 좋으련만…

이미 동생의 뇌는 많이 위축이 되어가고 있었고

전두엽과 해마의 손상은 거의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된 듯했다.

형제 중에 제일 건강체여서 어디 아프단 소리도 거의 안 해본 동생이었는데

건강한 사람이 한번 아프면 크게 아프다더니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한 얘기인가보다.

부디 시설에 가야 할 정도로 더 이상 악화되지 말고

그냥 딸 곁에서 딸이 돌 볼 수 있을 만큼만 아프길 간절히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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