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의 물감
문장의 일 (스탠리 피셔) 8장
첫 문장은 앞으로 펼쳐질 내용을 품고 있다. 첫 문장이 펼칠 세계는 무한하기에 첫 문장을 쓰는 공식은 존재할 수 없다.
첫 문장은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는 지점이다. 첫 문장은 새로운 세계를 그려내는 붓놀림이 처음으로 지나간 자리이고, 그 곳에 뿌려진 물감은 자신의 색채를 뽐낸다. 호기심에 이 호수에 발끝을 살짝 담가본 독자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어 미지의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 이후에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첫 문장이 열어놓은 세계 속에서 우리는 온갖 모험과 사투를 벌이고 친구와 만찬을 즐기다가 적수의 칼날에 찔리기도 하며 눈물의 골짜기와 포도 열매가 가득한 과수원을 오르내리기도 한다.
우리는 첫 문장을 씀으로써 새로운 세계와 만난다. 그곳은 내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안개 가득한 마을과 같다. 걷기 전에는 눈 앞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나, 첫 문장을 쓰고 한걸음 한걸음 조금씩 발걸음을 옮겨가면 안개 속에 숨겨져 있던 형체들이 조금씩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하고, 점점 밝아지는 햇살 아래 마침내 나는 내가 큰바위얼굴이 보이는 고요한 산골마을에 서 있음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