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크의 소설 "미지의 걸작"은 진정한 그림을 그리려는 화가의 이야기이다.
그림은 인물의 겉모습의 재현에 그쳐서는 안 되고, 그 안의 영혼까지 표현해야 한다는 신념 아래 필생의 작품을 그리려던 천재적인 화가가 이른 결말은 이런저런 선과 색이 복잡하게 얽힌 시커먼 추상화였다.
화가는 그 안에서 영혼까지 그려진 인물을 보지만, 옆의 다른 이들에게는 단지 무질서하게 교차되는 선과 색만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추상화는 영혼까지 담아내는 예술 형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화가는 자신의 그림을 보며 미치광이가 되어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버리고, 다른 이들은 실망에 가득 차 화가의 집을 떠나게 된다.
대상을 구현해 낸 그림엔 영혼을 담을 수 없고,
영혼을 구현해 낸 그림엔 실재(reality)를 담을 수 없다.
내용을 충실하게 발산시킨 형식은 무정형, 즉 형태를 잃은 추상에 가까워서 역설적으로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어렵다. 이것이 예술의 난제이다.
영혼을 담아내는 예술작품(그림, 음악, 글, 춤..)을 창작해 내기란 왜 이리 어려운 것일까?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아마도 영혼이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붙잡아 관찰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고, 지배할 수 없다. 그것은 신비 속에 있으며 단지 우린 가끔씩 그것을 느낄 뿐이다. 우린 영혼이 무엇인지 말할 수조차 없다. 말은 대상을 붙잡는 형태의 하나이고, 영혼은 말의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말이 세밀해질수록 영혼은 희미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내길 원한다.
예술이란 아마도 보이지 않는 영혼을 보려 하는 몸짓일 것이다. 예술가는 선과 색, 문장과 플롯, 손가락과 발끝, 음율과 리듬의 형식을 직조하면서 그 안에 영혼을 불러내어 그것을 마주 보고 싶어한다. 그 영혼이란 것이 나와 길가의 돌멩이를 다르게 만들어주는 것이기에. 그것을 일으켜 세워 그 눈빛을 바라보는 것이, 아마도 예술가의 냉정하고 차분한 마음속에 숨겨진 충동일 것이다. 예술가는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것과 싸우는 무모한 자, 그럼에도 다시 싸우는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