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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미 Jul 22. 2021

방지턱 없는 사람이랑 결혼했다

결혼 어떻게 했냐면, 자연~스럽게.

결혼을 하고 나니 한 두살 어린 후배 동생들이 심심치 않게 묻는다. 


"언니, 결혼하고 싶단 생각이 언제 들었어요?"

"누나는 형님 어떤 점 보고 결혼에 확신이 들었습니까 ㅋㅋ"


짐짓 어른스럽게 대답하려고 멋있는 답변들로 짱구를 굴려봤는데 정작 튀어나온 대답은 늘 같았다.

몰라, 정신 차리고 보니까 결혼해 있던데.


우습지만 진짜였다. 연애 초반에는 오랜만에 제법 설레는 감정도 느꼈었고 어머 이렇게 매일매일 좋을 일이야 하면서 낯간지러운 기분도 만끽했지만 그것 때문에 결혼을 결심한 건 아니었다.


결혼을 한다면 이 사람이겠구나, 처음 생각한 시점은 있었다. 연애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타이밍에 같이 앉아 티비를 보며 졸고 있다가 눈 떠보니 앞에 앉아서 갑자기 자기가 돈을 얼마 정도 모았는지 얘기한 적 있냐고, 곧 퇴사하고 받을 퇴직금까지 합치면 이 정도 금액을 모았다, 라고 설명을 하는데 잠결에도 이게 뭔 소린가 싶었다. 대뜸 돈 자랑 하는 것도 아니고(ㅋㅋ) 진지한 얼굴로 본인 통장 액수를 까발리는 것이 프로포즈가 아니고 뭐란 말임. 그거 뭐 큰 금액도 아니고 적은 금액도 아니었지만 숫자를 떠나서 얘 나랑 결혼할 생각이구나? 나 얘랑 결혼하겠구나? 생각이 처음 들었던 날이 그 날이었다.


미친 듯이 좋고 얘 아니면 안 되고 매일매일 짜릿하고 새로워야 할 수 있는 게 결혼이라고 생각했었다. 결혼에 대한 환상도 없고 의무감도 없어서 그깟 거 안 해도 그만이라고 큰 소리 쳤지만 생각해보면 저렇게 운명적으로 눈 맞고 미쳐 버리기 전까지 좋아해야 결혼해야지 하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먼저 결혼한 친구가 연애할 때도, 결혼한다 할 때도, 결혼 준비 하면서도 별다른 코멘트 없이 그냥 무난하고 자연스럽게 진행했다 할 때 좀 신기했었다. 근데 결혼해 보니까 그 말이 딱 이해가 되더라는 말.


연애하다가 결혼 얘기 나온 것도 처음에 어찌 나온 건지 기억도 잘 안 나고(...) 아마 일주일에 한 두 번 보며 헤어지는 타이밍에 아쉬워하다가 이럴 거면 결혼하자 ㅋㅋ 하고 장난 치던 게 현실화 돼서 정신 차려 보니 식장 예약하고 부모님들 만나 밥도 먹고 나는 어차피 자취하고 있으니 집부터 얼른 합치자 했던 게 시작이었던 거 같다. (그 맘 때쯤 혼자 살던 집 옆집 총각이 늘상 일본어로 노래 부르고 문 열어놓고 살아서 시끄럽고 무서웠는데 아마 그 총각 아니었으면 호다닥 신혼집 차리진 못했을 것 같다. 땡쓰 얼랏..)


엄마아빠 저 여자친구 남자친구 있어요, 그래 밥 먹자.

엄마아빠 저 얘랑 결혼하려구요 식장은 여기로 할게요, 그래 그러렴.

엄마아빠 저 얘랑 집부터 합치게요, 그래 그러렴.


남자친구야 우리 식장은 이렇게 하자, 그래 그러자.

여자친구야 우리 신혼집은 일단 여기로 하자, 그래 그럴까.

가전가구는 이런 걸로 하자, 그래 그러지 뭐.


거의 이런 흐름이었다. 좋게 말하면 둘 다 수더분했고, 양가 부모님들이 모두 알아서 하게끔 믿어 주셨다.

좀 겸손하게 말하면 둘 다 좀 생각을 깊이 안 하고(..) 양가 부모님들은.. 겸손하게 말할 수 없다. 무난한 결혼 진행에 가장 큰 공 세워주셨다고 봄. 어느 한 쪽 욕심 부리지 않으셨고 믿어주셨고 느그들이 좋을 대로 해라 하고 거의 손 떼주셨다. 일단 우리는 '얘라면 같이 살아도 되겠다' 같은 서로에 대한 막연한 확신 말고는 생각을 깊이 안 한 건 맞다. ㅋㅋ


양가 지원, 예물예단, 난 이렇게 하고 싶은데 얘가 이렇게 안 해줘, 인터넷에서 미디어에서 봐왔던 숱한 결혼 전 갈등은 남얘기가 되었다. 크게 걸리는 것 없이 결혼이 완료되어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결혼식을 미루네 마네 할 때도, 직전에 거리두기가 상향되어 지인들에게 연락 돌려가며 맘고생할 때도 잠시잠깐이었을 뿐 그냥 모든 걸 강행했고 지금도 참 잘했다 싶다.


그래서 말인데, 내 경험이 전부가 아니지만 적어도 내게 물어오는 친구들에게는 이렇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걸리는 게 없어서, 다 자연스러워서 결혼했어.


머리가 제법 커버린 두 사람이 같이 살면서 크고 작은 걸림돌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고. 되려 결혼하고 나서도 지지고 볶고 아주 뒤지게 싸울 때도 있지만 같이 있는 게 대단히 불편하지 않고, 둘이 맞춰가는 과정들에 엄청난 방지턱이 없어서 결혼할 수 있었다. 유난스러울 것도 없는 게 결혼이라더니, 그 말이 나한테 딱 맞다.


이제 난 결혼한 몸이니까 좀 시건방지게 말해볼 수도 있겠다, 결혼 그까짓 거 별 거 아니던디?


(정신 차려보니 어찌저찌 결혼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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