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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미 Jul 26. 2021

일기장에 남편 욕하기

안 싸울 땐 내 편이고 싸울 땐 남편이다

우리 둘은 매일 밤마다 같이 앉아 일기를 쓴다. 

우리 부부, 라는 표현은 아직도 어색하네. ㅋㅋ 부부라니까 너무 으른같잖아.


독립이라 하긴 완전하지 못한 자취를 시작하면서부터 꾸준히 일기를 써야지 하고 곧잘 다짐했었다. 매해 12월 말이 되면 설레는 맘으로 새 다이어리를 사기도 하고 스타벅스 프리퀀시 악착같이 모아가며 공짜가 아닌데도 공짜 같은 기분으로 수량 되게 많은 한정판 다이어리를 들고 다니기도 했다.


새 일기장을 펼쳐놓고 다음해 1월부터 12월까지, 월력을 한 장씩 넘기면서 엄마 아빠 오빠 생일부터 가까운 친구들 생일을 체크하고 올 해 목표는 운전연수다! 같은 거 적어두면서 뿌듯한 기분 느끼기도 했지만 이듬해 3월 즈음 되면 매일 적던 기록이 갑자기 3일에 1번씩으로 줄고, 날 더워지는 6월 쯤 되면 다이어리 펼쳐기만 해도 더위 먹는 것마냥 기록이 굼떠지기도 하고 뭐 그랬다.


그래도 작심삼일이 3일에 한 번씩 반복되면 매일 실천된다는 것처럼, 하루도 안 빼놓는 기록은 아닐지라도 매해 반틈 이상은 채운 일기장이 이제 몇 권 쯤 된다. (거기 약간 옛날 남자친구 땜에 빡친 기록도 있어서 우리 집 애가 열어보면 안 된다. 이 글도 보여주지 말아야겠다.)


결혼 날짜를 잡아두고 미리부터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인정하기 싫지만 진짜 엄청 싸웠다. 아무리 사이 좋아도 같이 살면 싸운다던데~ 이런 말 좀 비웃고 싶었는데 뒤돌아보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음이다. 하루가 머다 하고 싸웠고 사실 싸움의 빈도보다는 깊이가 심해서 갈라서네 마네 결혼식 전부터 이딴 소리도 해가며 뒤죽박죽 엉망진창 우당탕탕 명랑한 결혼생활 같은 거 했다 이 말이다.


처음엔 둘 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주에 한 번씩은 다투고 질질 짜고 하는 게 문제는 문제다 싶어 각자 심리 상담도 받아봤고, 이게 부부 치유가 아니라 각자 몰랐던 스스로를 돌아보는 굉장히 굉장하게 교훈적인 계기가 되어 우리 둘 관계에도 또 굉장히 굉장하게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이 얘기는 따로 좀 적겠지만.


아무튼 나름의 노력을 하면서 큰 싸움은 현저히 줄었지만 가끔씩 투닥대며 부딪치면서 서운한 거 얘기하다가 같이 일기를 좀 적자고 했다. 


워낙 말하는 거 좋아하고 입만 살아서 한 마디도 안 지고 없는 논리도 만들어 서운하다 어쩐다 쏟아내는 나와, 그냥 습관적으로 제 감정 말 안 하다보니 그게 자아가 되어 버려서 기분이 좋아도 나빠도 난 괜찮은데- 하며 본인도 모르게 숨기다가 한 번씩 폭발해버리는 짝꿍. 너무 극과 극이고 싸울 때마다 이걸 좁히기가 쉽지 않아서 일기를 쓰자고 했다.


나는 내 잘못 없는지 되새겨 보지도 않고 짝꿍한테 쏘아대기 전에 매일 일기장에 감정 털어내고 스스로 좀 천천히 생각해볼 것, 짝꿍은 매번 내게 말할 수 없다면 하루에 한 번이라도 일기장에 솔직하게 자기 감정을 생각하며 적어볼 것. 결은 달라도 서로에게 다 좋을 것 같아서 이렇게 제안했다. 


심지어 짝꿍한테는 그 일기장엔 나를 세상 나쁜 계집으로 상욕에 쌍욕을 해도 좋다고까지 선언.

했을 때 이 친구가 "그럼 진짜 이건 금기의 영역이야?" 하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어봐서 진짜로 내 상욕 썼을까 조금 궁금하긴 하다.


어쨌든 그 정도로 짝꿍이 자기 감정에 솔직해지길 바랐던 것 같다. 둘 다 사람인데 매번 상대를 아끼기만 하고 좋아할 순 없으니까. 혼자서 씹어 넘길 수 있는 감정들은 일기장에 한 글자 한 글자 이 악물고 한을 서려서 적어내면서 좀 풀고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 삭일 수 없는 감정들은 한 번 걸러낸 후에 주고 받을 수 있게끔.


누구나 니네 왜 싸웠어? 하고 물으면 시작은 아주 사소한 것이라 얘기하기도 옹졸하고 부끄럽다. 이런 건 시간 지나고 보면 별 게 아니라 지금 막 화가 나기 시작할 때 숨 한 번 쉬고 일기장에 적어 보면 감정이 좀 내려앉더라는 말이다. 꼭 서로를 향한 원망이 아니더라도 오늘 나 뭐했네, 대견했네, 오늘은 아쉬웠네, 내일 좀 더 잘해야겠네, 생각해보니 신랑 서운했겠네, 내일은 좀 잘해줘야겠네,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으니 일기 쓰는 건 계속 해봐야겠다 싶다.


우리집 애는 심지어 초등학생 시절 이후로 안 써봤다는 일기를 매일매일 빼곡히도 쓴다. 좀 다투고 일기장 사러 갔었는데 이것저것 집어보면서 펜이랑 골라잡는 거 보면 또 귀여워서 짜증남.. 펜 잡은 손에 온 힘 다 주고 빼곡히도 쓰느라 팔 아프다 하는 거 보면 어이없는데 또 뿌듯함. 이런 게 남편 키우는 기분인가..


요 며칠 또 작심삼일병이 도져서 둘 다 졸리다고 펜 놓고 일기장 접고 잠들기 바쁜데 우리집 애랑 다시 서로 시험 문제 풀듯이 팔로 일기장 가려가면서 좀 성실히 적어봐야겠다. 그리고 둘이 각자 일기장에 쓰는 마지막 세 줄 공유하고 자야지. 오늘 기분 좋았던 일 1,2번 + 속상했던 일 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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