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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미 Aug 21. 2021

파리를 좋아하는 이유

좋은 데 이유가 있을 수도


해외로 가는 발목이 코로나로 묶인지 벌써 곧 2년, 코로나 지겹다라는 말만큼 입에 달고 사는 질문이 있다. 


"코로나 끝나면 어느 나라부터 가고 싶어?"


지인들은 물론 스스로에게도 여러 번 자문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파리!"였다. 2년 째 장기화되고 있는 코로나 덕분에 이제는 희망마저 덜해져서 '솔직히 파리는 무리일 것 같고, 친구도 있고 가까운 싱가포르 정도면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힘 빠진 대답을 하곤 하지만 진심으로 가장 가고 싶은 곳은 파리다.


파리는 두어 번 가본 적이 있는 도시고,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나라를 혼자서 여행해본 나에게 곧 죽어도 가장 좋았던 곳이다. 늘상 파리를 입에 달고 사는 나에게 사람들은 묻곤 한다. 뭐가 그렇게 좋았냐고.





첫 파리 방문은 25살, 첫 해외여행이자 처음으로 혼자 하는 여행이었다. 야심차게 비행기표를 끊어놓고도 출국 직전까지 겁이 나서 비행기표를 취소해야겠다고 벌벌 떨던 스물다섯 휴학생은 영국까지 가는 긴 비행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여행책을 뒤져보기 바빴다.


3주동안 이어진 3개국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가 바로 프랑스 파리였다. 여행의 시작부터 파리의 미술관을 소개하는 책 한 권으로 조금은 충동적이었으니 너 어디 한 번 얼마나 멋진지 두고 보자는 마음으로 발을 내딛었던 곳이 파리였고, 이미 영국과 스위스를 돌고 왔으니 나름 첫 해외 방문에 대한 극도의 긴장도 어느 정도 여유로 바뀐 타이밍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파리가 좋았던 것 같다. 누가 동양에서 혼자 왔다고 인종차별이라도 할까 싶어 무섭고 미리 끊어둔 기차표 시간에 못 맞출까 불안하고 덜컥 소매치기라도 당할까 싶어 내내 긴장하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지고 뒤늦게야 여행의 맛을 느끼기 시작하던 3주차의 파리는 당연히 좋았을 수밖에 없겠다.



우동 먹으러 일본 가고 마라 먹으러 중국 가듯 그림 보러 간 파리(?)


온 나라 미술품도 골동품도 많은 영국의 박물관이나 내셔널갤러리도 좋았고 자세히 보려면 일주일은 잡아야 한다는 엄청난 규모의 루브르도 좋았지만 여전히 내게 1등은 오랑주리 미술관이다. 걸려있는 그림을 하나하나 온전히 보고 나와도 넉넉잡아 두 시간이면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이 미술관, 오르세와 루브르에 밀려 조금은 인기가 덜한 이 미술관 때문에 첫 여행 후 3년만에 파리를 다시 찾기도 했으니까.


파리의 미술관을 소개하는 책 속에서 처음 본 모네의 그림을 직접 보는 자체에 대한 감개무량도 있었지만 모네의 조언대로 빛이 잘 들어오는 공간 안에 길게 자리잡은 수련 시리즈의 붓질을 하나하나 내 눈으로 본다는 감동이 무진장 컸던 기억이 난다. 코 앞까지 가서 붓질도 보고 두 발자국 떨어져 꽃송이도 보고 또 이렇게 멀리서 그 붓질들이 완성한 그림도 본다. 두 번째 파리에서 촉박한 일정 속에서도 방문한 지베르니 모네의 정원에선 모네가 보았을 광경도 상상해 봤다.


미술은 잘 모른다. 대단한 이론도 없고 그렇다할 교양 지식도 없지만 어설프게나마 이렇게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을 직접 보는 재미를 배운 곳이 파리였다. 지하에 걸린 르누아르의 꽃 그림과 모딜리아니의 삐뚤빼뚤한 초상화도 본다. 이 나라 사람들은 이런 걸 자주 볼 수 있으니 좋겠다- 로 시작해서 그러고 보니 우리 나라 박물관도 미술관도 많을 텐데 우리 것부터 좀 봐야겠네, 라는 반성으로 끝났던 파리 미술관 여행.



제일 좋아하는 영화에 나온 제일 좋아하는 도시


두 번밖에 못 가본 파리지만 오랑주리 미술관과 함께 꼭 들르는 코스 중 하나, 몽마르뜨. 몽마르뜨 가면 팔찌를 강매하는 상인들이 많다더라, 하는 루머에 바짝 긴장하고 갔던 첫 몽마르뜨에선 무사히(?) 사크레 쾨르 성당 앞에 도착한 후 벤치에 앉아 두어 시간 가까이 말 그대로 멍을 때렸다. 언덕 밑의 파리는 바쁘고 분주했는데 언덕에 앉아 파리를 내려다보니 건물도 고만고만, 비슷하게 생긴 낡은 건물들 위에 갈색 굴뚝들이 참 평화로워 보여서 휴대폰도 넣어두고 계속 바라만 봤었다.


뒤에 앉아 저들끼리 흥얼거리던 흑인 관광객들이 갑자기 흥이 올랐는지 들고 온 기타 케이스를 열어 연주하기 시작했던 'No woman No cry'. 연주를 시작으로 노래를 부르더니 이게 지금 영화인가? 싶을 정도로 근처에 온 투어리스트들이 합창을 하더라. 이런 건 UCC시절 플래시몹으로나 몇 번 보았던 스물다섯짜리 동양인 여자애는 어안이벙벙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갑자기 가사도 모르는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각 잡고 열린 공연도 아닌데 노래가 끝나니 여기저기 박수도 터져 나오고 기타 케이스에 동전과 선물도 준다. 그 동양인 여자애 주머니에 동전이 없었던 게 여태까지 한이다. 지금이었다면 아깝단 생각 없이 지폐도 덜컥 냈을 텐데.


이후에 본 영화 <아멜리에>에 등장하는 몽마르뜨를 보면서 이 영화를 파리에 가보기 전에 봤더라면! 하는 탄식을 했었다. 그리고 두 번째 방문한 몽마르뜨 곳곳에서 그 영화를 곱씹었다. 주인공 아멜리에가 처음으로 니노와 마주친 아베쎄 메트로 역, 아멜리에가 일하던 풍차 카페와 그녀와 똑같이 숟가락으로 깨부숴본 크림 브륄레, 니노가 수수께끼하듯 아멜리에를 좇던 언덕 계단까지. 제일 좋아하는 영화와 제일 좋았던 도시를 되새기는 동안에 실제로는 처음 보고 들어본 하프 공연까지 더해졌다.




심벌은 심벌이네, 에펠탑.


여행지마다 심벌 역할을 하는 관광지가 있다. 서울에는 남산타워와 경복궁 정도가 있겠고, 일본엔 도쿄타워, 싱가포르에 머라이언, 인도의 타지마할 같은. 그 중에 단연 유명한 게 에펠탑이지 않을까.


흉하게 생긴 철탑이라는 구박데기로 시작된 에펠탑의 생이 이렇게 될 줄 에펠탑도 몰랐을 듯. 처음 파리에 갔을 땐 당연히 이건 실제로 봐야지! 하는 맘으로 찾아갔던 기억이 난다. 해가 지고 난 후 매 정시마다 반짝반짝 빛을 내는 에펠탑을 보면서 '와, 나 진짜 혼자 해외여행 왔구나. 혼자 무사히 여행도 하고 대견하다.'라면서 에펠탑보다 되려 내 자신에게 심취했던 것 같다(?) 너무 추워서 들어간 샤요궁 내부 카페에서 비싼 돈 주고 마신 에스프레소 양만한 핫초코도 잊을 수가 없다.


3년 후에 다시 파리에 갔을 땐 일정이 촉박하니 에펠탑은 들르지 말까 싶었다. 근데 막상 마지막 밤이 되고 보니 구글맵을 켜고 에펠탑 가는 길을 찾고 있네. 회전목마 앞 벤치에 앉아 해가 지길 기다리면서 오길 잘했다- 라고 생각했었다. 파리에 왔는데 에펠탑은 못 참지. 또 정각에 반짝이는 에펠탑을 보면서 저 큰 철탑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뭉클한 느낌을 줬을까 참 대견하기까지 했네. 얼마 전 <에펠 스타일>이라는 책을 보면서 에펠탑 너도 참 대단한 생을 살았구나 싶어 이번엔 존경스럽기도 했다.






파리만큼 호불호가 많이 가리는 도시도 없다고 한다. 겉으로 보기엔 예쁘지만 낡아서 노화된 시설과 건물들, 메트로역에서 종종 나는 불쾌한 냄새와 우리나라에 비하면 맘 놓고 다닐 수 없는 치안, 이전에 가지고 있던 파리에 대한 환상을 채워주지 못하는 파리에 실망하고 왔다는 이들도 많다. 파리를 무진장 사랑하는 일본인들 사이에는 '파리 증후군'까지 있다고 하니 알만하다.


반면에 나는 우선 여행만 가면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생각의 회로가 모두 긍정적으로만 돌아가기 때문에 모든 여행지에 대한 기억이 좋기만 하다. 하루하루 버텨내며 먹고 살기 바쁜 인생에서 목적지와 관계없이 여행은 언제나 숨통을 트여주고 없던 여유도 만들어주고 스스로에게 관대하게 하지만 파리는 특히나 그랬다. 


오그라든다는 자학으로 애써 감췄던 일말의 감성도 새어나오고, 자주 '고되다'라고 적었던 일기장에 술술 마음 속의 귀여운 본심들도 적게 되고, 갑자기 막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 '맞아, 그 사람 그래서 참 좋아, 그래서 참 고마운 사람인데 잊고 있었네.'라는 착한 감상에 젖게 되기도 한다. 유명한 예술가들이 왜 파리를 찾았는지 감히 알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아, 또 가고 싶다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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