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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미 Oct 23. 2019

1초동안 일어날 수 있는 일

글쓰기 좋은 질문 1/642

글쓰기 좋은 질문1. 1초동안 일어날 수 있는 일


서기 2015년 3월 10일 14시 27분 34초.

웨스트민스터 다리 위에서 나는 세상을 멈췄다. 아주 오랜 시간 계획했던 그 날이다.


떨어지던 빗방울이 공중에서 멎었고, 지나가던 여자의 헝클어진 머리칼은 어느 미술관 벽에 고정된 그림처럼 굳었다.

요즘같은 시대에도 동양인의 긴 눈매가 신기한 모양인지, 옆을 지나던 남자의 시선은 이방인에게 머물러있다.


실례, 동양의 이방인의 당신의 귀한 시간을 좀 훔쳐가리다.

오랜만에 시간을 잃은 세상 구경은 이쯤 해두고 손목시계에 시선을 돌린다.


시계의 초침, 분침, 시침, 세 개의 바늘이 바람개비처럼 빠르게 돌고 또 돌아간다.

63퍼센트, 78퍼센트, 95퍼센트, 100퍼센트. 


모두의 1초를 빼앗았다.

'빼앗았다'라기보다는, 선물. 선물을 받았다는 표현이 좋겠다.


지구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모두'의 수는 약 72억.

그들에게서 선물받은 1초가 차곡차곡 쌓여 72억 , 1억 2천만 분, 200만 시간, 8333, 228.

아직 남아있던 32년을 더하면 260년, 앞으로 서너 번의 생은 거뜬할 것이다. 마음이 두둑해진 느낌이다.

귀한 선물을 받은 만큼 훌륭히 살겠습니다. '모두'를 위해서 잠시 목례.


세상은 다시 열심히 움직인다.

멎어있던 빗방울은 다시 쏟아지고, 헝클어진 머리칼은 다시금 흔들거린다.

이방인을 흘기던 남자는 튜브역으로 쌀쌀한 걸음을 옮긴다.

하늘은 흐리지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오후다. 고개를 들어 빅벤을 본다.


서기 2015년 3월 10일, 지금 시간은 14시 27분 3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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