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소청대피소 예찬
1997년 여름, 처음으로 지리산에 올랐다. 큰 산을 걷는다는 거, 산에서 밤을 보내야 한다는 게 어떠한지 몰랐다. 8월 하순이었기에 정상 날씨는 상당한데도 준비따위는 없었다. 바람막이는커녕 긴팔도 준비하지 않았다. 도시는 더웠으니까.
첫째 날 연하천산장에서 머물렀다. 당시엔 예약제가 없어서 산장으로 몰려드는 모든 인원을 침상에 몰아넣었다. 정상적으로는 모든 인원을 수용할 수 없었다. 산장지기는 기지를 발휘했다. 침상에 한 사람씩 눕히기 시작했는데, 첫 번째 사람은 머리를 안쪽으로 두 번째 사람은 머리를 바깥쪽으로, 다시 세 번째 사람은 머리를 안쪽으로 눕혔다. 그러니까 양쪽 사람의 발이 내 귀 옆에 놓였다. 8월 여름이었다. 그렇게 눕혔는데도 자리가 모자랐다. 다시 산장지기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사람들의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을 던졌다. 누워있던 사람들에게 바닥에 닿은 등을 떼서 오른쪽을 바라보라는 거였다. 그리고 밀착. 지리산 품에서 머문 첫날밤, 그렇게 칼잠을 잤다.
둘째 날 장터목산장. 전날 밤처럼 힘든 시간을 또 버텨야 한다는 생각에 산장에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땐 산장 주변으로 텐트 설치와 비박을 허용했는데, 산장 주변으로 워낙 사람들이 많아 딱히 누울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무모한 결단, 천왕봉에 올라가서 자자. 커다란 후레시를 들고 장터목산장을 떠난 지 30분 되었을까, 배터리가 떨어졌다. 더 오를 수도 없고 내려갈 처지도 아니어서 그곳에 자리를 폈다. 이곳에서 자자. 10분도 채 버티지 못했다. 가방에서 어제 입었던 소금꽃 핀 티를 꺼내 껴입고 비옷도 입었다. 네모 난 부르스타(!)를 모박불처럼 켜고 다시 누웠다. 5분을 버티지 못했다. 이러다 죽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8월 여름 지리산 정상부에서 보는 하늘은 아름다웠다. 그날 새벽, 처음으로 오른 지리산에서 맞이한 일출도.
그렇게 시작한 국립공원의 대피소 경험은 하나둘 쌓였다. 자주 가지는 못해도 여러 대피소에서 밤을 신세졌다(설악산은 중청, 소청, 수렴동에서, 지리산은 노고단, 연하천, 벽소령, 세석, 장터목에서, 덕유산은 삿갓재에서, 소백산은 제2연하봉 대피소에서 머물러 봤다). 모두 나름의 운치가 있을 텐데, 그 중 최고는 주저없이 소청대피소를 꼽는다.
봉정암의 사리탑에서 보는 풍광은 아이맥스다. 왼편의 용아장성과 오른편의 공룡능선이 눈높이에서 시작해 내설악을 가른다. 그 사이로 수렴동, 가야동 계곡이 깊게 파여 있고, 그 끝자락에 백담사가 있다. 용아장성 너머 서북능선이 원근감을 더하며 든든하게 버티고 있다. 귀때기청봉을 위시한 서북능선은 설악에도 굵은 능선이 있음을 입증한다. 백담사에서 설악산을 오른다면 봉정암 사리탑에서 한참을 머물러야 한다. 그래야 한다. 이곳에 서면 그럴 수밖에 없다.
봉정암에서 30분 정도 오르면 소청대피소다. 소청대피소는 북쪽을 향한다. 봉정암의 사리탑이 저 아래다. 사리탑에서 보는 내설악이 아이맥스라면, 소청대피소에서 보는 풍광은 화각을 더욱 넓힌 파노라마다. 귀때기청봉에서 안산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서북능선과 그 뒤로 서있는 가리능선으로 설악은 더욱 웅장해졌다. 공룡능선 뒤로 마등령과 황철봉이 설악의 품을 넓히고, 아련한 수평선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동해가 파노라마의 오른쪽 공간을 채운다. 그 공간의 볼거리를 울산바위로 더하는데, 소청대피소에서 보는 장엄한 파노라마에서 울산바위의 역할은 귀요미다.
백담사에서 아침에 느린 산행을 시작해 도착하는 소청대피소는 저녁식사 준비로 분주하다. 겨울이 아니라면 무조건 대피소 앞 바깥 테이블에 버너와 코펠을 깔아야 한다. 친절한 직원도 없고 깨끗한 식탁보도 없다. 설거지를 할 수도 없고 쓰레기는 도로 배낭에 넣어야 한다. 그럼에도 햇반에 라면만을 끓여 먹어도, 이곳은 그 어느 곳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식당이다. 서북능선 뒤로 떨어지는 해를 보며, 해거름에 차츰 어두워지는 내설악을 보며 밥을 먹는다. 구름이라도 낮게 깔리는 날엔 더할 나위 없다. 7시간 산행이 주는 선물이다. 이곳은 천상의 레스토랑이다.
소청대피소는 2013년에 새로 지어 깨끗한 편이다. 산중에서 화장실을 고려하는 건 사치일진대, 소청대피소는 화장실마저 준수하다. 1인, 2인 등 예약자 수에 따라 함께 누울 수 있도록 침상이 분리되어 있다. 국립공원 대피소 중 가장 최근에 지어진 제2연화봉대피소의 경우 가지고 올라간 모든 옷을 껴입고도 밤새 추위를 견뎌야 했던 반면에, 소청대피소는 덥다고 할 수 있다(대신 제2연화봉대피소는 넓은 홀이 있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다).
대청봉에서 일출을 보려면 새벽 일찍 일어나 소청대피소를 떠나야 한다. 늦잠을 잤거나 늑장을 부리다 늦었더라도 좌절할 필요없다. 일찍 일어났을지라도 굳이 대청봉에 가지 않고 한번쯤은 소청대피소에서 아침식사를 즐기길 권한다. 아침 햇살에 내설악의 암봉이 선홍색으로 불(!)드는 장관을 보는 건 소청대피소라 가능하다. 남설악의 넘실대는 운해를 보지 못해도, 대청봉의 일출을 맞이하지 못해도 괜찮다. 아침의 내설악은 어제 저녁 보았던 것과는 다른 매력에 빠지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