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에서
새해 첫날 부석사에 갔습니다. 지난해 소백산을 걷기 위해 들렀던 풍기역을 1년 만에 다시 찾았습니다. 풍기역 플랫폼엔 소백산에서 찬 바람이 내려오는지 다른 곳보다는 썩 쌀쌀했습니다. 풍기역 앞에서 시간을 좀 보내다 부석사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부석사는 언제 가도 좋은 곳입니다. 사과꽃이 하얗게 필 때도 좋고,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때도 좋습니다. 유명세로 번잡한 때가 많다지만, 시간을 잘 고르면 조용히 머물다 올 수 있습니다.
부석사는 무량수전, 안양루와 같은 멋진 건축물도 좋지만, 무량수전 오른편에 있는 삼층석탑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좋습니다. 부석사의 여러 용마루 너머 멀리 희미하게 겹겹이 그려진 산등성이를 보는 게 좋습니다. 투명하면서 짙게 물드는 해거름 하늘을 본다면 더 말할 나위 없습니다. 한겨울 늦은 오후에 부석사를 찾는 까닭입니다.
무량수전에 들어 백하고 여덟 번 절했습니다. 마음으로 절하고, 3번 혹은 9번 절하긴 했지만 108번 절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무량수전에는 아미타불을 모셨습니다. 무량수전에 들면 아미타불상이 정면에 있지 않고 왼편에 있습니다.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정토에서 설법하며 중생을 구제한다는 부처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미타불상은 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보도록 배치합니다. 무량수전이 정확히 남쪽을 향해 있다보니, 무량수전의 아미타불상이 정면에 있지 않고 왼편에 있게 된 겁니다. 배치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일 테지만, 그 멋진 풍광을 보지 않고 옆으로 돌아앉은 모습에 경외감과 함께 측은함을 느낍니다.
70번째 정도 절을 할 때 허리가 묵직해졌습니다. 90번째 정도 절을 할 때인가 다리에 힘이 한 번 풀리기도 했습니다. 하나, 둘, 셋… 108번 절을 하면서 혹여나 더하거나 덜하지 않게 숫자를 세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순간순간 무엇을 바랐고 무엇을 기대하기도 했습니다. 백하고 여덟 번 절하고 허리를 펴는데 갑자기 목울대에 뜨겁고 물컹하게 올라왔습니다. 눈과 콧잔등도 뜨거워졌습니다.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지만, 그것이 언제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약 꿈길에도 발자국을 찍을 수 있다면
문 앞의 돌길이 다 닳아 모래가 되었을 것을
若事夢魂行有跡
門前石路半成砂
백하고 여덟 번 절하고선 해가 지길 기다리며 부석사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습니다. 부석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프레임인 조사당의 옆면도 한참을 보았습니다. 단순하면서 촌스럽지 않고, 차분하면서도 무겁지 않은, 그래서인지 눈에 잘 띄지 않게 숨어있는. 해가 낮아지면서 공기는 차졌지만 햇빛은 포근했습니다. 잘익은 살구 빛을 발하는 조사당 측벽에 드린 나무 그림자도 따뜻해 보였습니다.
그렇게 홀로 조사당에 머물다 삼층석탑으로 내려왔습니다. 해가 산 뒤로 넘어간 후 하늘은 화려해졌습니다. 해가 있어 드러나지 않았던 하늘과 산그리메는 더욱 짙었습니다. 삼층석탑 옆에 앉아, 급하게 나오면서도 잊지 않고 챙겼던 따뜻한 보리차도 마셨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습니다. 마치 이곳에 오면 으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너무 늦지 않게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