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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하 Jul 28. 2019

열두 살, 처음의 여행

#사이판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가 ‘처음’이라는 단어다. 처음으로 먹었던 젤라또, 처음으로 탔던 트램, 처음으로 썼던 카메라. 처음이 지나고 나면 몇 번이고 반복하게 될지도 모르는 보통의 경험도 ‘나 이거 처음이야!’라는 말이 붙음과 동시에, 그 평범한 순간이 마치 마법처럼 엄청난 모험으로 뒤바뀌는 탓이다.


 첫 해외 여행지는 드넓은 태평양 한가운데 올곧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조그마한 섬 사이판이었다. 2000년대 초반, 당시의 엄마는 자녀들에게 영어 교육이 필수라는 이야기에, 본인도 한 번 떠나보지 못했던 해외로 나를 떠나보내셨다.

 


 비록 타의에 의해 우물 밖에 나서게 됐지만, 경기도의 조그마한 동네에서 12년을 살았던 나에게 적도의 나라 사이판은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노랗게 빛나는 머리칼, 내 마음속도 꿰뚫어 볼 듯한 커다란 눈, 처음으로 직접 마주했던 서양인에 대한 호기심 어린 놀라움. 게다가 매일같이 뛰어놀던 제 동네에서는 볼 수 없던 이름 모를 열대 나무와 방 안을 제 집 마냥 기어 다니던 도롱뇽까지. 눈 앞에 처음으로 펼쳐지는 모든 풍경들은 적잖은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부모와 떨어져 익숙하지 못한 풍경에 적응해야 했던 탓이었을까 아니면 열두 살의 나에겐 해외에 대한 낭만이 그리 없었던 탓이었을까. 지금은 가고 싶어도 쉽사리 가지 못하는 그곳에서의 나는 이국의 풍경보단 두 달간 함께 생활했던 또래 친구들과의 시간이 더없이 행복했다.


 한창 겨울이었던 한국에서 적도의 날씨를 예측하지 못했던 엄마들이 선물한 귤 한 박스를 두고 카드 게임을 하던 때, 요리 시간에 직접 만든 뜨끈한 라자냐를 먹던 때, 혹은 영어 단어 퀴즈에서 상으로 주던 새콤달콤한 젤리가 삶의 낙이었더랬다.

 


 엄마의 바람과는 달리 두 달의 사이판 학교 생활에선 영어 공부보다 놀기에 바빴다. 그 끝이 다가올 무렵은 한국의 겨울방학이 끝나는 시기인 2월 말이었고, 학기 종료와 한국 귀환을 앞두고 사이판의 학교에선 학기말 여행을 떠났다. 무려 스피드보트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사이판섬보다 더 작은 ‘마나가하섬’으로.



 

 그때도 지금에도 마나가하섬은 일종의 관광 섬으로 개폐장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해가 질 무렵, 일정 시간 전에는 섬을 찾은 모두가 다시금 뭍으로 떠나야 했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을 위한 특별한 서비스였던가. 학기말 여행으로 마나가하섬을 찾은, 전교생이 50명도 안 되는 조그마한 학교의 학생들은 밤엔 전기도 물도 끊기는 그 섬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선생님들이 미리 준비해 놓은 수많은 게임을 낮부터 하나씩 해 나갔고, 물놀이, 요리 대결 등으로 아이들의 열기는 뜨거운 섬을 더욱 뜨겁게 달구었다. 짙은 어둠이 잦아든 밤에는 학생들에게 인기 최고의 레크리에이션인 담력 체험, 술래잡기가 이어졌다.



 레크리에이션을 진행했던 숲 속 넓은 공터에서 조금 걸어 나가면 동그란 해변이 있었다. 금방 바다와 맞닿는 여타의 모래사장과는 달리, 유독 넓고 커다랗게 원형의 모양으로 펼쳐져 있던 해변. 크기가 유독 커서 마치 운동장에 있는 듯한 그런 해변. 그 한 복판에 한 선생님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게임에 지쳐 휴식이 필요했던 나와 몇몇 친구들은 화장실을 갔다 돌아가는 길에 선생님을 발견했고, 그 옆에 살포시 앉아 선생님의 시선을 따랐다.





 처음엔 까만 어둠만 가득했고, 짙은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달빛에 옅게 비치는 수평선과 반짝이며 부서지는 파도가 들어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뜨거운 열대의 공기와 시원한 바닷바람이 섞인 여름 냄새가 풍겼다. 어두운 적막을 깨고 등 뒤, 숲 속 방향으로는 친구들의 흥겨운 발걸음과 웃음소리가 아스라이 퍼졌고, 앞에서는 모래 위를 구르며 찰락거리는 파도 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본디 허락되지 않은 그곳에 오직 우리만이 존재했던 그 밤. 이제 떠날 일만 남겨 둔 열두 살의 나는 사이판에 온 지 두 달이 다 돼서야 처음으로 두근거리는 떨림을 맛보았다.


 돌이켜보면 아마 그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가장 좋아하는 색이 파란색이 된 것도, 별과 달이 반짝이는 밤의 해변을 사랑하게 된 것도, 현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즐기게 된 것도. 사이판이 선물한 수많은 ‘처음’의 경험은 알게 모르게 나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곧 가족들이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크로아티아로 짧은 여행을 온다. 엄마는 유럽 여행이 처음이라 한다. 열두 살의 내가 사이판으로 향하던 그날. 출국장 앞에서 제보다 먼저 해외로 떠나는 어린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엄마의 얼굴이 어렴풋하다.


 엄마가 크로아티아로 오는 날엔, 공항에 먼저 가서 입국장을 걸어 들어오는 엄마를 향해 힘껏 손을 흔들어야지. 누구보다 든든한 얼굴로 엄마를 맞아 주고는 7일 간 엄마의 ‘처음’을 함께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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