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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하 Jul 28. 2019

아빠의 버킷리스트

#강원도 삼척



 어릴 적부터, 심심할 때면 하는 일이 있었다. 

 하얀 종이에 내가 나중에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적어 내리기. 그때 적어 내렸던 종이를 다시 들추어 보면 편의점에서 먹고 싶은 거 아낌없이 먹기, 길거리 음식으로 배 채우기 같이 가벼운 소망부터 렌터카 타고 제주도 여행하기, 스카이 다이빙해보기, 국제 영화제 참여하기,  LA에서 살아보기, 디즈니랜드 가보기, 세계여행 하기, 책 내기 등등. 참으로 원대한 소망도 많았다. 대체적으로 여행과 관련된 일이 주였고, 꿈꾸던 일들을 체계화시키며 나름 미래의 계획도 알차게 세웠더랬다. 


어릴 땐 내가 하는 행위가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하지 못했는데 한 영화를 보고 이를 지칭하는 단어를 알게 됐다. 

버킷리스트 Bucket List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나 꼭 하고 싶은 일을 부르는 단어. 나의 버킷리스트는 내 일기장, 메모장에 몸을 숨긴 채 본인들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무 살에 이사 온 지금 집 바로 앞에는 우리 가족이 즐겨 찾는 낙지 집이 있었다. 해산물을 특히 좋아하는 아빠는 이 집 낙지가 유독 싱싱하다며 소주 한 잔 생각나는 밤이면 꼭 향하던 집이었다. 2018년 10월 초, 오랜 시간 꿈꾸던 세계여행을 앞둔 때였다. 준비에 정신이 없던 터라 부모님과 저녁을 따로 먹던 그즈음, 엄마 아빠는 새로운 메뉴가 생겼다고 진짜 맛있으니 후회 안 할 거라며 한 번 같이 가보자 말씀하셨다. 


 고소한 불고기와 싱싱한 낙지를 한 데 섞은 요리였는데 낙지, 불고기를 쌈에 한가득 넣어 먹으면 고소하고 짭짤한 풍미가 입 안을 가득 채우는 게 참 별미였다. 처음 맛보는 신선한 맛에 따봉을 연신 외치며 쌈을 싸 먹는데, 평소처럼 소주 한 잔을 기울이던 아빠가 문득 나에게 물었다. 

버킷 리스트라고 아냐 정하야?”





 버킷 리스트라는 단어는 아빠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던 단어였다. 나에게 아빠는 ‘보수적인 어른’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묻는 어른보다는 안정적인 직업과 적당한 책임감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어른이었다. 그런데 아빠의 입에서 버킷 리스트라는 단어가 나오다니.. 그 단어를 어디서 듣고 오셨을까 하는 호기심과 동시에 조금의 놀라움을 드러내며 아빠에게 되물었다.


오~ 아빠 버킷 리스트도 아세요? 아빠 버킷 리스트는 뭔데요?”

 

 놀라움이 섞인 딸의 반응엔 아랑곳하지 않고, 아빠는 질문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곧장 대답하셨다.  

 “세 개가 있는데 일단 우리 가족 넷이서 골프 여행 가는 거. 두 번째는 넷이 다 같이 여행 가는 거. 그러니까 1번, 2번 같이 하면 되겠다.”

요즘 골프에 푹 빠진 아빠는 엄마와 둘이서 골프를 치러 다녀오곤 하셨는데 유일한 취미 생활을 딸내미들과도 함께 하고 싶은 모양이셨다. 골프를 치지 못하는 언니와 나는 그저 웃으며 연습 열심히 해야겠네! 소리 내어 웃었다.

 

음,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강원도 삼척에 넷이 가서 레일바이크 타는 거, 그게 버킷리스트네 아빠는.” 옆에서 불고기를 뒤적거리며 아빠의 말을 귀담아듣던 엄마도 아빠의 말이 끝나자마자 말씀하셨다. “응 엄마도 아빠랑 버킷 리스트가 같다. 너네랑 레일바이크 타러 가는 거”





 요 전날, 친척 어른들과 함께 강원도 삼척으로 여행을 다녀오신 부모님은 레일바이크를 타고 달리며 바라보았던 바다 풍경이 퍽이나 아름다웠나 보다. 여행에서 돌아오신 뒤에도 연신 사진을 보여주며 최고였다 말씀하시곤 했는데 이제는 딸내미 둘과 함께 레일 바이크를 타는 게 버킷리스트라신다. 

 

 버킷리스트 Bucket List
: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나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

 내 버킷리스트를 다시금 떠올려보면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배우며 실천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아직 보지 못했던 넓은 세계를 보고 궁금한 것을 배우며 내 안에 많은 것을 담아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 내는 것. 나에게 있어 버킷리스트는 미래를 향한 원대한 도전이었다. 



 반면 아빠의 버킷리스트는 엄마와 아빠 본인들이 이미 경험했던 일을 우리와 함께 다시 한번 경험하는 거였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딸내미 둘 데리고 삼척에서 레일 바이크 타는 거라니.. 사실 아빠는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았다. 살아생전 본인이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던 경험을 ‘가족들과 함께’하는 게 아빠의 버킷리스트였다. 

  아빠와 엄마는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정말 즐거웠다는 듯이 웃으면서 대화하셨다.

레일바이크 진짜 좋았는데 그치, 얘네 데려가면 진짜 좋아할 거야.”




 

 예상치 못한 아빠의 버킷리스트에, 곧 버킷리스트 하나 지우겠다며 세계로 떠나는 딸내미는 순간 울컥한다. 보름도 안 돼 떠나면 이제 일 년은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는데, 삼척 가서 레일 바이크 타는 게 뭐가 어렵다고.. 엄마와 아빠의 대화에 선뜻 끼어들지 못하고 낙지와 불고기만 듬뿍 떠와서 한 입에 넣어 버렸다. 입이 가득 차서 대답을 못하는 양 우물우물 밥만 씹었다. 


 

 아빠는 10대 시절부터 혼자 살며 생계를 책임지셨기에 고된 10대, 20대를 보냈다고 한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게 일상 다반사였고 생계 때문에 학교도 1년 늦게 들어가 친구들보다 한 살 나이도 많다고 하셨다. 무뚝뚝한 아빠가 두 딸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인생의 교훈이 딱 하나 있다면, 

“아빠는 몰라서 못 챙겼다, 너네는 지금부터라도 건강 챙겨라, 운동도 챙겨서 하고, 치아 관리도 잘하고, 젊을 때부터 챙겨야 나중에 후회 안 해.” 


 60대의 나이에 접어들며 잦아진 병원 행에 아빠의 후회가 담겼다고 엄마는 말씀하신다. 이제 먹고 살 만해지니 몸이 아프셔서 아빠도 속상하셔서 그러신 거라고, 잔소리로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처음 DSLR 카메라를 사겠다고 엄마 아빠에게 말했을 때 엄마는 말했다. 

“어 이 카메라는 어때? 너네 아빠도 젊을 때 사진 좋아했는데” 하며 꺼내 보여 준 낡고 오래된 필름 카메라. 옆에서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아빠는 젊을 때 즐겼던 그저 잠깐의 취미 생활이었다고 담담히 말씀하셨다. 10대 시절부터 본인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본인이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아빠의 젊은 날들. 

 


 결국 모질게도 딸내미는 삼청에서 레일바이크를 타지 못한 채 비행기에 올랐다. 다행히 떠나온 지 9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부모님은 건강하게 한국에서 일상을 보내고 계신다. 쉽사리 속내를 내비치지 않는 두 분이기에 모든 걸 알 수는 없지만, 조금이라도 건강하실 때 아빠의 버킷리스트를 하루빨리 이루고 싶다. 


 레일바이크를 타면서 말하면 될까, 계속해서 생각해 온 하나를 아빠에게도 살짝 전하고 싶다. 가장의 무게를 내려놓고 이제는 아빠의 행복도 조금 신경 쓰셨으면 좋겠다고. 오그라든다며 아빠에게는 사랑 표현도 잘 못하는 딸내미의 마음은 사실 이렇다고. 지금까지 이렇게 행복하게 자라게 해 주셔서 참 감사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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