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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하 Aug 03. 2019

영화와 아일랜드가 내게 알려준 것

#아일랜드



 영화를 좋아한다. 10대 시절엔 수능 공부도 제쳐두고 일주일에 세네 편씩 영화를 봤고, 20대 초반에는 매일같이 취향에 맞는 새로운 영화를 찾아내 영화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곤 했다. 꽤 많은 영화를 보았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사실 그저 많이 보고 재미있게만 봤을 뿐, 작품성을 논하거나 예술성을 판단하는 진짜 마니아 관객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영화에 담긴 부가적이며 소소한 것들이 나의 영화 취향을 결정했다. 가령 영화의 줄거리와 등장인물의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영화 속 풍경이 아름다우면 영화를 멈출 수가 없었으며, 매력적인 배경음악이 흘러나오는 장면이 곧 제일 좋아하는 장면으로 귀결되곤 했다. 그렇게 신곡 차트에서 1위를 달리는 음악보다는 감명 깊게 본 영화의 배경 음악을 플레이리스트에 담는 사람이 되었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국적인 풍경을 보며 다음 여행지를 계획하곤 했다. 가이드를 동행하는 여행을 선호하지 않지만 그나마 유일한 가이드가 있다면 아무래도 ‘영화’라 보면 되겠다.



 

 아일랜드로 향한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다. 영화 <P.S. 아이 러브 유>, <프러포즈 데이>, <원스>, <싱 스트리트>까지, 네 영화 모두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촬영한 영화였다. 여타의 유럽 여행지처럼 유명한 유적지가 따로 없고 휴양지로 적격인 나라도 아니지만, 영화로 배운 아일랜드에는 사랑과 음악이 가득했고 나에게 그 땅을 밟지 않을 이유란 없었다.


 특히 영화 <프러포즈 데이>에서 우연히 마주친 두 주인공 에나와 데클랜은 함께 차를 타고 아일랜드를 떠돈다. 영화의 줄거리보다도 주인공 뒤로 펼쳐지는 아일랜드의 자연에 매료된 나는 그날 이후, 아일랜드 로드 트립을 꿈꾸게 됐다. 당시 운전을 못했기에 렌터카 대신 히치하이킹이라는 무리수를 겸해서 말이다.




 

 내 인생 중 홀로 했던 최고 난이도의 도전은 역시 이때의 경험이 아니었을까 싶다. 부끄러워서 많은 사람들 앞에 서면 말도 잘 못하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면 과한 긴장 때문에 배탈이 나곤 하면서, 그땐 나를 지나치는 수십 대의 차에다 어찌나 열심히 손을 흔들었던지.

  마을을 빠져나가는 길목에 서서 다음 목적지를 커다랗게 적은 시리얼 박스를 열심히 흔들었던 그때. 비록 영화와 같은 로맨틱한 낭만은 마주치지 못했지만 무수히 많은 예측 불가능한 상황으로 여행이 차곡차곡 실하게 채워졌다.


 옆 방을 쓰던 호주 친구와 함께 저녁을 먹다 친해져 그 후 이틀간 친구 차를 타고 함께 여행하며 편하게 아일랜드를 둘러봤다든가, 조금밖에 못 태워줘서 미안하다며 자식들을 위한 할로윈 데이 선물을 주는 아저씨를 만났다든가, 차를 태워 준 두 커플과 친해져 이틀은 소요될 거라 예상했던 일정을 하루 만에 소화했다든가, 목적지까지 이동은 물론 하루 함께 여행을 하고 헤어지던 때에 네 명의 친구들에게서 ‘우리의 하루를 만들어줘서 고마워’라는 수줍은 찬사를 들었다든가 하는 일들. 오히려 생각대로 흘러간 날을 손꼽아야 했던 여행 속, 예측 불가능했던 순간들이 하나씩 모여 아일랜드 여행을 완성시켰다.

 



 

 아일랜드 여행 이후, 여행 콘텐츠 마케팅 회사에 입사했다.

 약 1년 8개월을 일했던 당시 내 업무는 호텔, 레스토랑, 여행지의 명소를 취재하고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일이었다. 관심이 없더라도 호텔의 침대와 욕실을 찍어야 했고, 음식 메뉴의 가격과 여행지의 정보를 끊임없이 확인해야 했다. 출장을 다녀와 포스팅을 준비할 때는 애매한 표현과 설레는 감성보다는 한치의 실수도 없는 정확한 사실과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필요했다.


 물론 행복한 경험이었고 많은 것을 배운 시간이었지만 한 가지 부작용을 얻었으니 휴가 차 떠나는 여행에서도 여행이 아닌 ‘일’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는 거였다. 여행 일정은 미리 준비해야 마음이 놓였고,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담던 카메라에는 이제 수많은 정보성 사진이 담겼다. 미리 준비한 일정은 완벽하게 소화해야 했고, 미리 준비한 계획이 어긋날 때면 기분조차 엇나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곧 스트레스가 되곤 했다. 내가 미리 준비한 범위 안에서만 여행이 흘러가야 마음이 놓이는, 언젠가부터 여행에 누구보다 엄격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살짝 돌아가, 나를 아일랜드로 떠나게 했던 영화 <프러포즈 데이>에서 두 주인공 에나와 데클랜은 우연히 낯선 이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된다. 집주인 부부를 위해 저녁 요리를 준비하던 중 에나는 요리책이 알려주는 ‘중간 크기의 당근’을 찾기 위해 밭에서 고군분투한다. 큰 당근과 작은 당근은 있지만 중간 크기의 당근을 찾지 못해 한숨 쉬던 애나. 이를 보던 데클랜은 애나의 손에 있던 큰 당근을 반으로 부러뜨린 뒤 애나에게 말했다.


여기 중간 크기의 당근이요.
애나, 모든 걸 통제하려고 하지 마요.
 이건 그냥 요리예요



 


 적어도 과거의 나에게 있어 여행의 가장 큰 묘미는 ‘예측 불가능성’에서 오는 즐거움이었다. 옆 방에 호주 친구가 올 일을 예측하지 못했고, 어떤 차에 오를 지도, 어떤 사람을 만날 지도 미리 계획하지 않았다. 그저 무수히 많은 가능성 중 한 가지 우연이 나를 반겼을 뿐이며 그 속에서 행복을 찾았다. 예측할 수 없기에 더욱 즐거웠던 게 나의 여행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시작한 지 9개월이 돼간다. 버릇이 쉽게 사라지진 않는다고 떠나오기 전 초반에는 장기로 이어질 여행을 누구보다 꼼꼼히 준비했다. 하지만 아무리 빈틈없이 준비한다 해도 9개월이 넘는 장기 여행을 전부 예측할 수는 없기 마련이다. 능력 밖의 일은 계속해서 벌어지고 계획했던 경로를 이탈한 지는 이미 오래다. 여행지는 계속해서 수정됐고, 한 치 앞도 예상하지 못한 채로 여행이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오늘의 나는 조금은 완벽하지 않은 하루에도 가볍게 웃어넘길 마음의 여유가 생겼고 오늘에 집중하며 예측 불가능한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이 됐다.




 지금은 여행을 떠나 올 때 계획에도 없던 나라 알바니아의 한 카페에 앉아 있다. 당장 내일 어디서 잠을 잘 지, 어느 도시로 떠날 지 정해진 게 없다. 그래도 불안하지는 않다. 두 명의 여행객을 재워 줄 숙소는 어딘가에 있을 테고 아직 내 주머니에는 한 끼의 저녁을 먹을 돈이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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