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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하 Aug 03. 2019

육개장 집, 부녀의 대화

#세계여행


 딸만 둘이었던 우리 집에선 다 함께 가족 나들이를 갈 때면 둘씩 짝을 정해 움직이곤 했다. 엄마는 애교가 많고 밝은 둘째 딸을 아빠에게 보냈고, 엄마 본인은 이른 사춘기를 맞이해 낯을 가리던 언니를 챙기곤 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엄마가 준 역할을 착실히 이행하며 스스로가 가족을 잇는 중요한 역할을 가졌다는 귀여운 자부심을 가지곤 했다. 


 하지만 10대의 사춘기를 거치며 고정 좌석과도 같은 그 위치가 싫어졌다. 항상 엄마 옆에만 있는 언니가 미웠고 아빠 옆으로만 나를 보내는 엄마에게 서운했다. 살가운 모녀의 대화에 끼고 싶던 어린 질투심이었다. 


 

 어린 질투심은 옆에 있는 아빠에게로 향했다. 어린 날에 대한 아쉬움을 뒤늦게라도 채우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아빠보다 엄마 옆으로만 향하기 일쑤였다. 학교, 학원, 남자 친구, 날 둘러싼 조그만 인생 이야기에 대해 엄마에게만 모든 것을 전했고 회사 일로 바쁜 아빠와는 따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종종 아빠와 단 둘이 있는 상황이 오더라도 그리 많은 이야기가 오가진 않았다. 텔레비전 화면 속 장면에 대한 짧은 대화, 그리고 오늘의 반찬에 대한 작은 품평만이 부녀의 대화였다. 



 어느 날 엄마는 갑자기 저녁 약속이 잡혔다며 아빠와 둘이 먼저 저녁을 먹으라 했다. 평소처럼 집에서 밥을 먹었다면 TV 속 주제로 어색함을 감추었을 텐데, 집에 아무런 재료가 없어 외식이 불가피한 날이었다. 

 아빠는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 동태 탕을 드시고 싶다며 눈치를 주었지만, 둘째 딸은 육개장 집으로 향하자 눈치 없이 말했다. 소주 한 잔 들어가며 깊은 대화가 오가는 한 끼보다는 간단하게 후딱 먹고 올라오기 좋은 한 끼를 원했던 탓이었다. 

 



 아빠와 둘이서만 보내는 시간이 조금 어색한 딸은 육개장을 기다리며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생각하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당시, 27살의 나이에 퇴사를 결정하고 세계일주를 준비하던 때. 감기 기운 탓에 따듯한 물로 목을 축이며 요리를 기다리는 나에게 아빠가 먼저 얘기를 꺼내셨다. 


여행 준비는 잘하고 있고?”

네. 일단 학원 다니면서 영상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학원은 다닐 만 해?” 

재미있어요. 꾸준히 하면 좋을 거 같아요. 


 오랜만에 단둘이 나누는 서로에 대한 대화에 살짝 어색하지만 기쁘던 때. 식탁에는 새빨간 육개장 두 그릇이 올라왔다. 아그작 깍두기를 씹으며 얼큰한 국물을 들이마시는 와중에 아빠는 말씀하셨다. 평소와는 다른 긴 이야기. 


사실 너희 엄마랑 나, 너네 언니는 하고 싶은 걸 하진 않잖아. 
아빠랑 엄마는 먹고살려고 돈을 벌었고,
언니도 하고 싶은 걸 하는 거 같아 보이지는 않고.
 
그런데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넌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하잖아. 
그러니까 한 번 해봐.
진짜 해보겠다는 거 한 번 해봐.


 갑작스러웠다. 식탁에 다 같이 앉아 말 많은 둘째 딸이 재잘대던 때, 아무런 반응도 없이 식사만 하던 아빠. 내 이야기에 관심이 없나 보다 여겼던 아빠는 계속 귀를 열고 계셨나 보다. 

 일 년 동안 영어 공부를 하겠다고 새벽같이 나가 밤늦게 들어오던 때도, 영화사를 잘 다니다 갑자기 여행 일을 하겠다며 여행 콘텐츠 회사에 들어가던 때도, 갑자기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세계일주를 떠나겠다고 이야기하던 때도. 언제나 엄마만 듣고 있다 여겼던 내 삶에 대해서 아빠도 조용히 듣고 계셨다. 

 

 갑작스러우며 진지한 아빠의 이야기에 조금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는 딸에게, 아빠는 연이어 말씀하셨다. 


네가 선택한 게 실수였어도 걱정하지 말고 돌아와.
아무도 책망하지 않고 뭐라 하지 않아.
자존심 같은 거 세우겠다고 계속 잡고 놓지 못하면 안 돼.
‘아니다’라고 느낄 땐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돌아와.
우리가 있으니까 그냥 돌아오면 돼.




그리고는 딸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아빠는 혼자 소주 한 잔을 들이켜셨다. 

“이 집 깍두기가 맛있네.” 


 어릴 적부터 집을 나와 혼자 살다 보니 가족의 살가운 정이 어렵다던 아빠. 사춘기 두 딸내미의 살갑지 못한 태도에도 서운한 티 하나 없이 든든하게 뒤를 지켜주던 아빠는 그날따라 둘째 딸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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