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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하 Aug 04. 2019

한국말을 잘하던 네팔 아저씨

#네팔


 예상보다 훨씬 차가운 바람이 살갗에 닿았다. 차가운 바람을 조금이라도 가려 보겠다며 배낭이 몸에 착 달라붙도록 있는 힘껏 배낭을 잡아당겼다. 네팔 직전에 여행했던 미얀마에서는 쳐다보지도 않았던 경량 패딩도 서둘러 꺼내 걸쳐 입었다. 장기 여행자에게 겨울을 대비한 의류는 그나마 조그만 부피를 차지하는 경량 패딩이 다였기에, 오직 경량 패딩과 배낭의 온기에 의지한 채 길을 걸을 뿐이었다. 

 

 12월의 네팔로 향한 이유는 죽기 전에 한 번쯤 히말라야 산맥을 밟아 보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딱히 이유 없는 욕심이었다. 그냥 한 번쯤 해보고 싶어서. 그게 다였다. 



 

 트레킹을 준비하는 시간이 그리 여유롭지는 않았다. 네팔에 입국할 당시, 가장 짧은 기간인 15일 여행 비자를 신청했기에 준비부터 트레킹, 끝난 뒤 휴식까지 모두 15일 안에 해결해야 했다. 네팔 관광청에서 퍼밋(입산 허가증)과 TIMS(트레커 정보 관리 시스템)을 신청하자마자 포카라로 향했다. 


 포카라는 수많은 트레킹 용품점과 숙소가 밀집되어 트레킹을 하는 이들이 무조건 들르는 관문과도 같은 도시다. 히말라야를 향한 갈망을 품은 이들의 시작과 끝이 모이는 점과 같은 도시, 포카라.  




 이른 새벽 포카라에 도착한 뒤, 간단하게 아침을 먹으며 9일 간 진행할 트레킹 루트를 확인했다. 다음 미션은 등산화, 등산 스틱, 침낭 등 트레킹을 위한 장비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포카라의 트레킹 용품점에서는 등산용품을 굳이 구입하지 않아도 대여가 가능하다. 일회성으로 등산을 하고 떠나는 이들이 많기에 준비된 서비스다. 장기 여행자인 나 또한 가격이 비교적 저렴하고, 가볍게 왔다 가볍게 떠날 수 있기에 구입 대신 ‘대여’를 선택했다. 

 

 저렴한 가격을 찾기 위해 가게 이곳저곳을 다니며 가격을 확인했다. 그중 우리가 머물던 숙소 바로 옆에 있는 트레킹 용품점에서는 네 살 정도로 보이는 귀여운 소녀와 소녀의 엄마가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등산 스틱, 침낭 등의 대여비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주던 소녀의 엄마는 본인의 남편이 한국어를 잘한다며 나중에 또 오라고 이야기했다. 



직접 다녀 본 세네 곳의 가게 중 가장 친절하고 가장 저렴했기에 저녁을 먹은 뒤 우리는 다시 그 집으로 향했다. 소녀와 엄마 대신, 아까 엄마가 이야기했던 소녀의 아빠가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유창한 한국어가 그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바람막이, 침낭, 스틱 그리고 또 뭐 필요해요?”

세계일주를 시작한 지 3달이 가까워질 무렵, 먼 타지에서 한국어를 쓰는 아저씨를 만나니 참 반가웠다. 어쩜 그렇게 한국어를 잘하세요 묻자 아저씨는 15년 전쯤, 한국에서 선박 관련 공장 일을 하셨다고 했다. 당시 돈을 열심히 모았고 네팔로 돌아와 이렇게 트레킹 용품점을 열었다 설명하고는 건너편 집에도 한국에서 일했던 아저씨가 있다며 친구를 불러왔다. 

한국어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모처럼 쓰는 한국어에 신이 났고 두 아저씨는 오랜만에 한국어를 쓴다며 수줍지만 유창한 한국어를 내뱉었다. 서울에 대해서, 부산에 대해서, 90년대의 한국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필요한 트레킹 용품을 모두 대여해 숙소로 돌아가는 길. 네팔어로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깎아 주세요만 공부했던 내가 조금은 쑥스러워지던 찰나 떠오르는 생각 하나. 


 만약 한국에서 아저씨들을 만났다면?
방금 전처럼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고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을 나누었을까?

 

 

정답은 ‘아니오’였다. 

나에게 네팔에서의 그들은 한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는 반가운 ‘외국인’이었지만, 한국에서의 그들은 한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는 ‘외국인 노동자’에 불과했을 테다.


한국에 머물던 때, 지금껏 단 한 번도 내 곁을 스치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웃음을 준 적도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눈을 마주친 적도 없으리라. 낯선 피부색의 사람과는 괜스레 거리를 유지했고 조금은 과한 경계심을 품었다. 소극적인 마음의 차별과 눈빛으로 그들을 대했다. 차별이 얼마나 모자란 짓인지 알면서, 내가 받은 부당한 차별에 대해서는 그렇게 날을 세우고 차가운 눈빛에는 그렇게 쉽게 상처 받았으면서 나 역시 한국에서는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었다.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던 두 아저씨에게 한국은 어떠한 이미지였을까. 두 한국인을 그리 반갑게 맞이해준 걸 보면 그들에게 한국은 조금은 따스한 나라였을까. 그들이 느끼는 한국이 내가 느꼈던 네팔처럼 조금은 따스했길, 다시 돌아간 한국에서의 나는 낯선 타지의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이 될 수 있길. 지난날의 나는 여전히 부끄럽지만 내일의 나는 조금 다른 사람이길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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