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플레이그라운드> (로라 완델, 2021)
❐ 모두를 위한 기독교 영화제 시사회를 통해 관람한 영화 <플레이그라운드>의 리뷰입니다.
영화 <플레이그라운드>
영화 <플레이그라운드>에서 어떤 종류의 갑갑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카메라 프레임이나 창백한 색감, 그리 유쾌하지 않은 영화 소재의 탓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대부분이 이미 경험한 바 있는, 한없이 좁고 빽빽해서 결코 이탈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나와 타인들과의 관계망에 대한 기시감을 느껴서인 건 아닌지. 이 기시감은 중요하다. 저마다 자신의 감정을 노라(마야 반데베크)에게 이입할 수 있어야 노라의 시선과 감각으로 구성된 영화의 세계에도 입장할 수 있기 때문에. 요컨대 <플레이그라운드>는 먼저 관객에게 들어오라고 말한다. 학교 안으로. 운동장으로. 좁고 밀도높은 관계망 속으로. 들어와야만 실체를 들여다볼 수 있으므로. 그러니 오프닝 시퀀스에서 학교로 가기 싫지만 가야만 하는 사람은 노라만이 아닌 것이다.
노라의 (관계의) 선은 처음엔 단순했다. 자신과 오빠 아벨(군터 뒤레) 사이의 선이 거의 전부라 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시간이 흐르며 그가 연루된 선의 갯수가 불어났다. 오빠가 가담자로 있는, 집단 폭력의 현장을 기웃거렸다가 자신이 피해자가 될 뻔하고, 그런 동생을 보호하느라 오빠가 집단폭력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자책감과 연민, 그리고 오해와 불신, 분노가 타인들과 연결된 노라의 선 사이를 타고 오갔다. 인력과 척력을 주고받으면서 형성된 그 무수한 관계의 선을 견디며 노라는 조금 자란 걸까. 영화의 후반부에서 노라가 성장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쇼트가 등장하긴 하는데, 영화는 그 과정을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라 돌출적이고 의외의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 같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 방식을 ‘바깥의 방식’이라 하면 어떨까. 영화는 시종 초점 인물 노라를 중심으로 프레임을 구성하느라, 노라를 제외한 인물들은 프레임에서 초과되거나 바깥으로 위치한다. 이 방식은 일차적으로 노라를 향한 관객의 밀도높은 몰입을 겨냥한 것이겠지만, 또 다른 효과도 있다. (프레임 바깥에 있어) 눈에 보이진 않지만, 명확히 존재하고 실재하는 인물들을 상상하게 만드는. 내부만이 아니라, 바깥까지도 가리키는. 우리는 그들의 표정을 직접 볼 순 없지만 노라의 제스처나 리액션을 보면서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는 있다. 이런 형식으로 영화는 내부만이 아니라 바깥까지도 환기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생각을 하게 된 계기를 나는 영화에서 발견했는데, 시종 불쾌감을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던 노라가 처음으로 선생님에게 짜증을 내던 장면에서였다. 그 짜증에는 자신에게 다정했던 아녜스 선생님(로라 베린덴)이 학교를 떠난 것과 내내 의지와 연민의 대상이었던 오빠가 이제는 수치스럽게 느껴지는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인데, 바뀐 담임선생님은 진정되지 않는 노라를 교실 바깥으로 내보낸다. 바깥에서 안정되면 들어오라고. 거기서 노라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화장실로 가는 이스마엘을 발견하고 그를 따라가 묻는다. ‘우리 오빠 때문에 우는 거야?’ 오빠를 제외한 다른 누구의 슬픔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던 노라였는데, 거의 처음으로 노라가 타인에게 연민을 품은 장면이다. (물론 이 관심은 연민이 아니라 그를 괴롭힌 사람이 ‘오빠’라는 것을 확인하려는 시도라고 읽힐 여지는 충분하고, 어쩌면 그런 독법이 더 타당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내가 이 장면에서 주목하는 것은 노라가 품은 관심의 시작이 교실 ‘바깥’에서부터였다는 점이다.) 이 장면에서 급기야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됐는데, 영화는 어찌보면 사소하면서도 돌출적이기까지 한 ‘바깥’에 대한 것을 환기하기 위해 시종 영화 속 공간과 장면을 갑갑하게 그린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영화평론가이자, <모두를 위한 기독교 영화제>의 수석 프로그래머이신 최은 선생님은 영화 <플레이그라운드> 시사회가 끝난 직후 열린 무비토크에서 이런 말을 하셨는데, 내용을 요약해서 인용하자면 이렇다. “영화가 죽음을 계속 상기시키는 듯한 대목이 인상 깊어요. 추락하거나 하강하거나 매장되거나, 숨을 참거나, 다른 사람을 질식시키려 한다든가.”(워딩 그대로 가져오지 않고 뉘앙스를 간추려 인용했다.)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나는 영화 <플레이그라운드>가 상기시키는 죽음은 어쩌면 (삶의) 바깥에 대한 탐구인 것은 아닐까, 라는 질문이 따라 들었다. 위에서 거듭 적은 ‘바깥’과 ‘(삶의) 바깥’의 관계에 관해선 사려 깊고 세심한 접근과 논의가 필요할 텐데, 우선은 여하간 그것이 바깥과 관련되어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 단락을 맺자.
사람이 깊어진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내면 깊숙한 곳으로 침잠해 들어갈 수 있는가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타인의 처지와 정서를 끌어안는 태도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생각을 영화 <플레이그라운드>는 하게 만든다. 순서를 바꿔서 다시 말해볼까. 내가 타인(나의 바깥)을 끌어안는 것은 내부(심연)의 나까지도 함께 포옹하는 것이라고. 이런 점에서 영화의 마지막에서 아벨을 꽉 끌어안는 노라는 어쩌면 저 자신도 납득하기 어려운 자신의 감정(수치심, 분노, 증오), 즉 자신의 바깥마저 함께 끌어안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칠까. 영화 <플레이그라운드>의 원제가 ‘Un Monde’(세상)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세상에서 아이들은 이런 식으로 자라고 깊어진다. 자신과 타인의 관계, 자신과 자신 사이의 관계가 언제나 원하는 대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관계의 균열을 발견하고, 불화의 흔적을 응시하면서. 실망하더라도 그것을 끝내 끌어안으면서.
부기
이 영화를 지난주 화요일(5.17)에 열린 <모두를 위한 기독교 영화제> 시사회에서 처음 접했는데, 이것대로의 의미를 적어두고 싶다. 거창하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는 자기 내부에만 깊은 관심을 두는 많은 교회들에게 ‘바깥’에 대한 성찰을 환기하도록 도울 수 있지 않을까. (2022. 5.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