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웨일>
찰리(브렌던 프레이저)는 오클리 대학교에서 에세이 작문 강의를 맡았다. 그는 강의를 원격으로 진행하는데, 의아하게도 그는 노트북 카메라를 켜지 않은 채 자신의 프레임을 그저 암흑에 가까운 검정으로만 채우고 있다. 상관없다는 듯 강의하는 그의 목소리는 태연하다. 보다 못한 수강생 중 한 명이 이렇게 채팅한다. “왜 아직도 카메라를 고치지 않으신 거지?” 카메라가 고장 났다며 그는 그동안 변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우리는 안다. 고장 난 것은 카메라가 아니라 찰리 자신이라는 것을. 바둑판식으로 배열된 수강생들의 얼굴 한가운데 생경하게 자리 잡은 그의 검은 화면은 곧, 그의 내면 깊은 곳이 꿰뚫린 동공이라는 것을. 그때 영화가 찰리의 검은 화면을 향해 서서히 줌인하는 것은 상징적이다. 지금부터 찰리의 심연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듯이.
그러니 292kg의 거구라는 찰리의 외형은 그의 내면 속 동공과 연결해서 생각해야만 한다. 요컨대 그는 자신의 텅 빈 내면을 채우기 위해 먹는다. 하지만 그의 허기는 그것으로 채워질 수 없는 종류인 것이어서, 무엇을 삼켜도 허기는 여일하다. 그의 허기는 생의 불가해함에서 오기 때문이다. 연인 애런의 자살. 자신의 연인이 죽음의 길로 걸어갈 때, 그 걸음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 그와 나눈 사랑은 충만했는데, 왜 기어이 죽음을 선택해야만 했나라는 아득한 질문. 그러니 찰리의 체중은 사실 그의 삶을 짓누르는 저 무거운 질문의 무게와 같다. 생의 압도적인 질문이 그를 옥죄어올 때, 그는 보조기구에 몸을 지탱하거나 누군가의 지극한 돌봄으로 저 자신의 무게를 겨우 나누면서 견디는 중이다.
이 동공은 찰리의 것만은 아니어서, 찰리의 딸 엘리(세이디 싱크)도, 그를 돌보는 리즈(차이 홍)도, 찰리가 새로운 연인 앨런을 선택하면서 떠난 전처 메리(사만다 모튼)도 저마다 깊은 구멍을 간직하고 있다. 그들은 세상을 향해 자신의 분노를 던지거나(엘리), 알코올에 중독되거나(메리), 아예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자신의 직업이 되었다.(리즈) 리즈의 직업이 간호사라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오빠 앨런의 자살에 자신이 무능했다는 것이 그의 직업으로까지 이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찰리는 죽어가는 중이다. 울혈성심부전이 심해지면서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5일 정도밖에 남지 않은 것. 생의 마침표 앞에서 찰리는 수강생들을 향해 ‘에세이는 진솔한 글이어야 한다’라는 점을 강조하는 점은 생각해 볼 만하다. 타인의 문장을 가져와서 내 글을 꾸미거나 상투성 뒤로 스스로 숨지 말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세상 앞에 드러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이런 식의 작문은 철 지난 ‘진정성의 윤리’를 가져오는 것이 아닐지. 자기 내면을 파헤치는 방식이 아니라 자유자재로 발화자의 포즈를 바꾸면서 ‘나’를 탐색하는 글도 얼마든지 훌륭할 수 있다는 점을 그는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걸까.
하지만 진정성을 향한 그의 집착을 찰리의 내면에 거대하게 자리 잡은 동공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어딘가 짠한 데가 있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불분명하므로 그는 자명한 것을 찾으려는 것이다. 세계가 불투명한 안개로 뒤덮여있을 때, 그는 자신의 내부만큼은 투명하게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그가 글에 대해 보이는 태도는 자기 삶 앞에서 보이는 태도와 같다. 불확실한 장막을 걷어버리고, 자기 내면에 투명하게 반응하기. 있는 그대로 응시하기. 그것만이 자기 삶에서 확실하게 잡을 수 있는 가치라는 듯이.
<더 웨일>은 한 사람이 자신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고 꺼내 보인다면 어떤 막이 가로막더라도 끝내 타인과 연결될 수 있음을 긍정한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가령 이런 장면들에서 이 생각은 더 강해졌다. 딸 엘리가 찰리의 연인이었던 앨런이 왜 죽었냐고 그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지 않은 질문을 불쑥 던지자 찰리는 대화를 중단하고 화장실로 간다. 흐르는 물소리에 자신의 통곡을 숨기려고. 하지만 엘리는 그의 울음을 알아차린다. 한편, 찰리의 집에 피자를 가져다주는 배달원(사티야 스리드하란)은 찰리가 문을 열어주지 않는 탓에 그의 얼굴을 보진 못하지만, 집 밖에서 그와 대화를 이어간다. “괜찮으세요?”라는 질문으로 시작되는 둘의 대화는 애틋하다. 또한 새생명 선교회의 선교사로 살게 된 토마스(타이 심킨스)가 자신의 아픔을 솔직하게 엘리에게 말할 때에도, 엘리와 토마스 사이에는 문이 있었다. 저마다의 아픔은 문과 벽을 통과하여 끝내 타인에게로 전달된다.
종교적인 초월을 믿지 않는 <더 웨일>이 붙잡는 구원은 수직이 아니라 수평이다. 타인의 기척에 반응하는 것. 찰리의 말을 빌리자면, “타인에게 무관심한 사람은 없으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나의 어두움을 있는 그대로 꺼내 보이는 것. 그럴 때 사람은 다른 사람을 구원해 낼 수는 없지만, 그의 아픔을 함께 앓거나 적어도 반응은 할 수 있다는 것. 궁극적 구원과 절대적 초월을 믿는 나로선, 영화의 결론에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저 태도가 이 불가해한 삶에서 유한한 인간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라고 한다면 눈물겨운 데가 있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자신에게 솔직한 것은 사실 신에게 솔직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완강하게 병원 치료를 거부하는 찰리의 입장은 사실 궁극적 구원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원하지도 않는 영화적 태도와도 맞닿아있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 삶의 허기는 채워지지 않고 우리 심연의 구멍은 메워지지 않는 것 아니겠냐고. 병원 치료를 거부하는 찰리에게 치킨을 건네는 리즈의 손길은 아르노프스키 감독의 생각과도 같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다른 인간을 향해 근원적으로 치료(구원)하기란 불가능하다. 한 사람의 심연을 다른 사람이 결코 메워줄 수 없다. 다만 한 순간 다가왔다가 사라질 그 짧은 위안만 겨우 주고받을 뿐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신의 존재가 간절하게 요청된다고 생각하는 나는, 별 수 없는 기독교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들에 울적해 하면서 문득 승천하려는 듯 발이 들린 찰리를, 영화 속 모든 어두움을 삼키는 환한 빛으로 덮인 엔딩 크레딧이 어쩐지 신적인 순간과 멀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멍해졌다. (2023. 10.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