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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여자 의사 Dec 19. 2020

결혼이라는 게, 참

결혼이라는 걸 하긴 했습니다만, 결혼이라는 걸 딱히 믿지는 않습니다.






 A는 양가와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하던 중 암을 진단받았다. A의 시어머니가 될지도 모를 사람은 A의 부모님이 이혼한 것을 탐탁지 않아 하던 중이었다. 암이 진단되자 시어머니가 될지도 모를 사람은 A에게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결혼을 허락하겠다고 했다. 제안은 수술과 방사선치료 대신 자연 치료를 하는 것이었다. A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고 결혼을 허락받았다. 매일 밭에서 새로 뜯은 채소만을 삼시 세끼 먹었고, 맨발로 흙길을 걸었다. A는 간병에 지친 엄마가 힘이 없어 고기를 먹으면 “그게 입으로 들어가냐”며 화를 냈고, 제발 병원에 가자고 하면 “엄마는 내게 그런 말 할 자격이 없다”며 소리쳤다. 머지않아 암은 전이되었고 A는 파혼을 통보받았다. 현재 A는 항암 치료 중이다.



 B는 남자 친구가 금요일 밤 이후 주말 동안 연락이 잘 안 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를 추궁하자 남자 친구는 연상의 다른 여자가 있음을 실토했다. 하지만 그 여자는 B와 만나기 전에 잠시 만났다가 헤어질 타이밍을 애매하게 놓쳐서 여태 만나고 있을 뿐, 곧 정리하고 결혼은 B와 할 것이라고 했다. B는 그 말을 믿고 만남을 지속했다. 하지만 남자와 다른 여자는 서로 다른 지역에 근무하다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 밤까지 남자의 집에 함께 머무는 사실상 주말 부부의 관계를 유지했다. 헤어지자고 말하던 날, B가 그 여자와 결혼할 거냐고 물었을 때 남자는 “미쳤냐? 내가 그 늙은 여자랑 살게?”라고 대답했다. B는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꽤 오래 술독에 빠져 살았다. 여전히 B는 심리치료 중이다.     


 C는 58년생 개띠다. 며칠 밤을 새워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만큼 고된 시집살이를 35년간 해왔다. 첫째 아들이 손녀를 가졌을 때 즈음, C는 막 대학생이 된 늦둥이 딸과 함께 집을 나왔다. 공황 발작에 가까운 극심한 불안과 몸의 통증은 씻은 듯 사라졌다. C는 명절에 처음으로 한가한 커피숍에 앉아 며느리에게 말했다. “제사를 안 지내도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구나.” 하지만 여전히 C의 남편은 이혼을 원하지 않고, 경제적 지원을 차츰 줄여가는 방식으로 재결합을 종용하고 있다. 터무니없이 오른 전셋값 때문에 C는 이번 겨울이 가기 전에 훨씬 작고 먼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할 것 같다.






결혼이라는 게, 참 사람 병신 만드는 것 같다.






 A, B, C 중 누군가 내게 한 말이다.

 사실 그녀들은 결혼 앞에서 자신의 이성이 전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비이성과 불합리 안에 스스로를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고, 그 참담한 탄식과도 같은 말에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미혼의 30대 여성이나 별거 중인 중년 여성이 겪어야 할 압박과 조급함과 두려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서른이 되던 해에 어려움 없이 결혼했고 아무런 생각 없이 신혼을 즐기다 딱히 계획되지 않은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다. 나에겐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공감할 자격이 없었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이 정한 답의 명령에 큰 고민 없이 순종하기로 선택한 사람이었다.

 

 페미니스트로의 정체성을 고백하며, 순종의 항로 위에 서 있음으로써 그 명령을 강화하고야 말았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질 때면, 그 부끄러움조차 또 다른 폭력의 단초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하고는, 이도 저도 하지 못한 채 굳어져 눈만 겨우 껌뻑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도 자격 미달의 기혼자인 내가 결혼이라는 이 이상한 관습에 대해 글을 쓰는 이유는, 나의 고통이 그들의 아픔과 결코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 때문에 고통받는 여성이 많은 사회일수록, 출산의 강요가 심한 사회가 되고, 워킹맘들이 좌절하는 사회가 되며, 이혼한 여자들이 숨겨지는 사회가 된다.

 하나를 죽어라 달성하면 더 큰 목표치를 자연스럽게 들이 밀어버린다. 그러다 어느 한계에 이르러 백기를 들고 포기해 버리면, 그간의 모든 노력은 완전히 공중 분해되고 포기했다는 사실만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속해있던 모든 대표성 위에 추악하게 남는 것이다.


 잘 사는 것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라 닦달하면서, 고민할 시간도 주지 않고 대답을 너무나 큰 소리로 외쳐대는 사회. 그 소리가 너무나 커서 귀를 막지 않는 이상 도저히 휘둘리지 않을 재간이 없고, 온 힘을 쥐어짜 겨우 귀를 틀어막으면 부적응자 취급을 받는 사회.


 하지만 그 대답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우리 세대의 여성들은 다 알아버렸다. 그러니 그녀들이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며 겪는 인지 부조화의 혼란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쯤 되면 이 문제에 놓인 모든 덫을 다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된다. 만약 애초에 출제 자체가 잘못된 문제라면 오류가 난 정답지를 들고 아무리 짜 맞춰봐야 그건 그냥 의미 없는 시간 낭비 아닐까? 그럴 바엔 그 문제지를 결대로 좍좍 찢어 노즈워크나 하라고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니 부디 바라건대, 내가 사랑하는 여자들이 더는 답 없는 문제 앞에서 스스로를 탓하며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래의 나의 딸이 여자를 좋아할지 남자를 좋아할지, 결혼을 할지 말지, 아이를 가질지 말지, 이혼을 할지 말지, 알 수는 없지만, 만약 결정의 과정에서 누구라도 큰 목소리로 강요의 주먹을 휘두른다면, 한 대 얻어맞기 전에 선빵으로 코를 후려갈길 수 있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이제 진심으로 내가 꿈꾸는 것은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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