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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여자 의사 Dec 27. 2020

아기가 향수를 먹었어요






진료실이 벌컥 열리며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이 들어왔다. 아기 엄마는 울고 있었고 아기 아빠는 아기를 아기 띠에 매고 들어왔는데 두 사람 다 잠옷에 가까운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아기가 향수를 먹은 것 같아요.




그 말과 함께 엄마가 떨리는 손으로 내민 건  엄지손가락 크기의 작은 샘플 향수병이었다. 연한 핑크색의 향수가 가득 들어 찰랑거리는 것이 보였다. 곧장 아빠 품의 아기를 쳐다봤다. 막 10개월이 된 여자 아기는 몽돌처럼 까맣게 반짝이는 눈으로 내 목에 걸린 연두색 청진기만 쳐다보고 있었다.

 

 향수병의 뚜껑을 열어보니 상큼한 꽃향기가 났다. 과연 호기심 많은 아기라면 한 번쯤 혀를 대어 보고 싶은 향이었다.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아기가 향수병을 들고 있었는데 뚜껑이 열려 있었고 입 주변에서 향기가 났다고 했다. 병에 거의 가득 들어 있는 상태로 내 손에 들어왔으니 정말 먹긴 했을까 싶었지만, 어쨌든 아기는 그렇게 현장에서 검거되어 내 진료실로 당장에 연행된 것이었다.


 그렇게 부모와 대화하는 사이에도 꾸준히 내 목의 청진기만을 노리고 다가오고 있는 아기의 손에, 알코올 솜으로 한 번 더 소독한 청진기 한쪽을 가져다 대자 덥석 잡으려 들었다. 그 움직임이 생각보다 빠르고 힘도 강해 하마터면 청진기를 정말 뺏길 뻔했다. 반응 속도와 근육의 운동능력은 지극히 정상이라는 뜻이었다. 다행히 호흡음이나 목 안쪽도 정상이었다. 부모의 말대로 입 주변에서 지나치게 좋은 향기가 나는 것만 빼면. 


 사실 향수에서 가장 위험할 수 있는 성분은 메탄올이다. 향수의 성분 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변성 알코올을 만들기 위해 에탄올에 아주 소량이지만 메탄올 등을 섞기 때문이다. 메탄올은 과량 노출될 경우 운이 좋으면 시력을 상실하는 것에서 멈추지만, 운이 나쁘면 사망하게 된다. 따라서 실수로 향수를 먹게 된다면 그 향수의 성분을 검색해서 그중에 메탄올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좋다. 만약 메탄올이 들어 있는 향수를 과량 복용했다면 당장 응급실로 가서 이런 사실을 의료진에게 고지하고 응급처치를 받아야 한다. 

 

 그 외에도 육아를 하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화학 성분의 음용 사고 시에는 빨리 병원에 내원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그 사이 당황해서 해서는 안 될 행동으로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으므로 미리 알고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

 등을 두드리거나 손가락을 넣어 억지로 토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을 먹었느냐에 따라서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약의 경우에는 아직 흡수되지 않은 경우 토해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액체 세제 (알칼리성), 부식제, 광택제, 휘발유, 살충제 등을 먹었을 때에는 토하는 과정에서 식도와 위를 더 상하게 할 수 있으며, 기도로 넘어갈 경우 폐까지 손상될 수 있으므로 절대 억지로 토하게 해서는 안된다. 또 물이나 우유를 먹여서 희석시키방법도 일부 세제에서는 도움이 있지만, 나프탈렌이나 담배를 먹었을 때는 그렇지 않다. 나프탈렌은 비록 적은 양이라도 G6PD 결핍 환자에서는 용혈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조치 없이 응급실로 가서 활성탄이나 하제 투여 등의 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 담배를 1/2 개비 이상 먹었다면 물이나 우유를 먹이지 말고 응급실로 가야 한다. 물이나 우유의 섭취가 소장으로 담배를 이동시켜 니코틴의 흡수가 빨라지기 때문이다. 건전지, 매니큐어, 유리나 금속 조각을 삼켰을 때에는 아무런 조치도 하지 말고 최대한 빨리 응급실로 달려가야 한다. 


 어쨌든 이 날쌔고 호기심 많은 아기가 입을 댄 향수에는 특별하게 위험한 성분은 없었고 아주 소량 복용한 것으로 보이며 현재 상태도 양호하므로, 나중에 응가에서 꽃향기만 조금 날 것 같다고 농담을 하자 엄마는 그제야 눈물을 멈췄다. 밤새 구토나 설사, 의식이 처지는 증상 등이 나타나지 않는지를 관찰하도록 설명한 후 귀가하도록 했다. 그렇게 아이의 가족은 향기만 남기고 진료실을 떠났다.













 가족이 떠나고 차트를 정리하다 말고 문득 인턴 시절이 떠올랐다. 응급실 당직을 서다 보면 만나는 가장 난감한 케이스 중 하나였던, 아무런 증상은 없지만, 너무 운다는 이유로 응급실을 찾은 아기와 부모들의 엉망진창의 몰골. 극악의 업무강도에 시달리다 새벽 3시가 넘어 겨우 선잠이 들려고 하는 그 찰나에 꼭 들이닥치곤 했기에, 천근만근의 몸을 질질 끌고 나가며 아기가 우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속으로 툴툴거렸던 기억이 생생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울다 울다 목이 쉬어 쇳소리가 나고 얼굴도 터질 듯 시뻘게져서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를, 부모는 안았다 업었다 유모차에 태웠다 젖병을 물렸다 별짓을 다 하며 진땀을 흘리고 난 후에도 고민에 고민을 수백 번 반복한 끝에 응급실로 향했다는 사실을. 그게 바로 그들이 응급실에 당도한 시각이 새벽 3시가 되는 이유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정말 야속하게도 막상 차를 타고 응급실에 도착하면 아기는 열에 일곱 정도는 엄마 품에 잠들어있다. 부모도 의사도 민망해지는 그 순간에 아기는 거짓말처럼 숙면 모드다. 아무것도 모르던 인턴 시절엔 부모가 유난스러워 이렇게 잠만 잘 자는 아이를 왜 그렇게 득달같이 데려왔나 생각했지만, 이제는 자동차의 일정한 소음과 진동이 마법의 꿀잠 유도제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엄마·아빠도 엄마·아빠가 처음이라 정말이지 모든 게 낯설고 두렵다는 사실을, 이제야 직접 체험하면서 이해하는 중이다. 유난스러운 '맘충'이라는 단어가 가진 폭력성이 얼마나 많은 부모를 이유 있는 불안으로부터 위축시키는지도 비로소 알게 됐다.


 의사가 환자를 진료할 때 단순히 진찰과 검사로 환자의 안위만 평가하거나 치료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진료실에 함께 온 보호자의 이유 있는 불안에 공감하고 그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근거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까지가 진정한 진료의 범위가 아닐까 어렴풋이 생각해본다. 엄마도 처음이지만 의사도 처음이라 이렇게 중요한 것을 이렇게 천천히 배워가는 게, 참 죄스럽다.


 향수를 먹었던 아기는 몇 달 후, 예방접종을 하기 위해 다시 내원했다. 아기 응가에서 꽃향기가 났었냐고 묻자 엄마는 빵 터져서 웃었다. 당연히 그 순간에도 아기는 내 연두색 청진기를 조물딱 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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