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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editor May 21. 2021

지금 나의 말이 유언이 된다면

"뜨거운 물 좀 떠 와라."

"그때 만났던 청요릿집에서 곧 보세"

"다음 만날 때에는 네가 좋아하는 종로에서 보자."

"요즘 충무로에는 영화가 없어."


시인 박준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한 문장 정도의 말을 기억하려 애쓰는 버릇이 있단다. 모두 그가 기억하는 누군가의 마지막 말이다.


"역으로 나는 타인에게 별생각 없이 건넨 말이 내가 그들에게 남긴 유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조금 따뜻하고 예쁘게 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책에 담긴 시인의 말들에는 따뜻함과 예쁨을 향한 노력이 짙다.


나도 꽤나 많은 말들을 마음에 담는 편이다. 어떤 기억엔 말과 장면이 통째로 기억 속에 살아 움직이고, 어떤 말의 한 마디는 모서리에 마음 한 구석을 찔려 아파한다.

대체로 좋은 말보다는 아픈 말이 더 오래 살아남아 있다.

그래서 어떤 말을 듣는 것에 주저함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 말을 신중히 걸려내는 편도 아니면서.

다 그렇게 사는 거 아냐?

그러다가 아이들을 떠올렸다.


아이는 나의 '어떤 말'을 기억할까? 오늘 내가 아이에게 건넨 마지막 말은 무엇일까?

매일 밤마다 책을 읽어 준다. 어떤 좋은 글들이, 이야기들이 아이의 마음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푸르른 이파리, 달디 단 열매가 맺히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요 며칠 밤마다 숙제 문제로, 태도 문제로 아이를 혼냈고, 아이는 울다 지켜 잠들곤 했다.

그런 날은 꼭 아이가 악몽을 꾸듯, 몸을 심하게 뒤척인다.

얼굴을 쓰다듬고, 이불을 고쳐 덮어주며 미안한 맘을 대신한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 이것밖에 못해? 너 혼날래? 등등"

대체로 이런 뉘앙스의 아픈 말들...


시인은 말한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세상에서의 마지막 날 검은 글자 빼곡한 유언장을 아이에게 건네 듯,

영원히 아이의 마음속에 살아남을 어떤 말을 다짐하는 밤이다.


#박준#운다고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시인#에세이#초등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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