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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니 Jun 14. 2017

모든 여행자의 이상,  
쿠바 아바나.

<살사도 모르면서 아바나>를 시작합니다.

살사도 모르면서 아바나 Prolog

모든 여행자의 이상, 쿠바 아바나

'이상형이 어떻게 돼?'

기억나지 않는 아주 오래전부터 꽤 최근까지 이 질문을 수백 수천번은 들어본 것 같다.

나름 곰곰이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키는 크지 않아도 좋지만, 배는 안 나왔으면 좋겠어. 그리고 코는 오뚝하고, 쌍꺼풀은 없으면 좋겠는데.

자주 만날 수 있으면 좋겠고, 꽃은 가끔 선물해 주었으면. 차 같은 건 없어도 되지만 나와 함께 걷는 걸 좋아했으면 좋겠군. 술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좋지만, 담배를 즐기는 건 별로. 비슷한 일을 한다면 말이 잘 통하겠지, 무엇보다 유머 코드가 잘 맞으면 좋겠네.' 

라는 글을 지금 몇 줄 적어 내려가는 이 순간에도 이상형을 이렇게 정리하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 생기며, 동시에 이런 타령이 재수 없다는 건 아주 잘 알겠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상형'이란 어쩌면 절대 닿을 수 없는 이상적인 상이 아닌, 환상에 가까운 상이 아닐까. 나와 잘 맞을 가능성을 가진 사람을, 내가 꾸며놓은 환상에 맞지 않는단 이유로 아예 처음부터 상대를 마음에 들이지 않기 위한 비겁한 도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연애와 사랑, 그 이전에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상형이란 최고의 핑계는 아닐까. 

물론 그런 100퍼센트의 상대가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가 나를 좋아할 확률도 과연 100퍼센트 일지.


여행지를 의인화한다면, 쿠바는 아마 그 이상형에 가장 가까운 여행지일 것이다.

그곳을 다녀온 사람들의 모든 글과 사진이 쿠바를 185센티미터의 키에 수려한 외모의 다정하며 섹시한 남자로 그리고 있다.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도시의 한 복판으로 매캐한 연기를 내뿜는 에어컨도 없는 미국 올드카가 지나간다. 어디선가 끊임없이 음악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춤을 추며 길을 메운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서 그늘을 찾아 들어가 모히또를 마시며 헤밍웨이와 체 게바라를 이야기하는 곳. 카리브해의 바람이 심장을 간지럽히는 그런 곳.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가운데서도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이방인에게 따뜻하며 자신의 삶의 터전을 사랑한다.


이상적인 여행지다. 퇴근해도 계속되는 회사 동료와의 단체방 채팅과 매일 똑같이 느껴지는 일상, 해야 할 것들로만 가득하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은 하지 않을 자유가 없는 삶에 지치면 누구나 훌쩍 떠나고 싶어 진다. 그리고 쿠바는 이런 삶이 있는 곳과 가장 반대되는 곳이겠다. 실제로도 지구의 반대편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쿠바와 카카오톡만 주고받다 실제로 소개팅 장소에서 만났을 때 나는 조금 당황했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이 차가 과연 제대로 굴러갈까'하고 걱정이 되는 오래된 차를 탔지만, 차에선 에어컨 바람이 나왔다. 어디선가 음악이 계속 흘러나오긴 했지만, 관광객들은 무료로 그 음악을 즐기기 쉽지 않다. 모히또는 기대보다 맛있지 않았다. 쿠바인들은 쿠바를 사랑하고, 동시에 미국도 사랑하는 것 같다. 


뭔가 한 대 맞은 것 같다. 아! 그렇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쿠바는 사실 타인의 시선으로 빚어놓은 환상의 쿠바 아니겠는가. 타인의 맛집, 타인의 숙소, 타인의 풍경, 타인의 기념품, 타인의 랜드마크. 그것을 따라 여행을 한들 타인의 여행을 대신하는 것 외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 

여행자가 여행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그래, 한번 네가 얼마나 좋은지 내게 보여줘 봐라.'는 태도는 버리고, 여행지와 친해지고 가까워지려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선 모히또 대신 피나콜라다를 퍼마셨으며, <노인과 바다>도 안 읽어봤으니 헤밍웨이 투어는 하지 않았으며, 가이드북의 추천보다 현지인의 추천을 믿었으며, 택시가 앞에 서 있는 식당에 무작정 들어가서 가성비의 끝을 경험하고 왔다. 아마 이곳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몰랐을지도 몰랐을 여행의 진짜. 이상형 따윈 내려놓고 이번엔 진짜 제대로 여행해보라고. 쿠바는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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