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브레이커블 키미 슈미트>에 그려진 확장의 순간
사이비 교주에게 납치당한 키미는 꼬박 15년을 지하 벙커에 갇혀 지냈다. 교주에게 끌려가던 당시의 키미 나이가 15살이었으니, 살아온 만큼의 시간을 지하 벙커에서 보낸 셈이다. 우여곡절 끝에 서른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온 키미는 무척 조급해졌다. 15번의 크리스마스를 놓치고 살아온 게 너무나도 억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미는 자기 마음에 억울함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잃어버린 15년을 따라잡기에도 바쁜 마당에 운명을 탓하고 처지를 비관하며 귀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어둡고 눅눅한 시간은 지난 15년으로 충분해. 기적처럼 되찾은 이 귀한 일상을 어둡고 눅눅한 감정이 좀먹게 두고볼 수는 없어.’
그래서 키미는 매일 매일 과장되게 웃었다. 하하하. 호호호. 나쁜 생각이 찾아오려 하면 눈을 감고 머릿속 동화나라로 도망쳤다. 사자와 토끼가 단짝 친구로 지내는 그 동화 나라에서 키미는 노래를 부르며 마음의 평안을 되찾는다. 그리고는 다시 하하하, 호호호, 웃는다.
하지만 표현되지 못한 어둡고 눅눅한 감정은 키미의 마음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한 번도 표현된 적 없고, 한 번도 소화되지 않은 감정은 점점 거대해져만 갔다. 그것들은 틈나는 대로 키미의 정신을 습격했다. 키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친구의 목을 조르고,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롤러 코스터 위에서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에 키미는 상담사를 찾아갔다.
키미는 벙커에서의 경험에 대해 공들여 이야기했다. 자기 문제의 원인을 벙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담사는 벙커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엄마와의 관계에 대해 듣고 싶어 했다. 키미는 도대체 이게 엄마와 무슨 상관이냐 물었고, 상담사는 천기 누설이라도 하는 듯한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부모와의 관계가 문제에요. 항상 그렇답니다.]
엄마는 17살의 나이로 키미를 낳았다. 그것도 롤러 코스터 안에서. 자신이 원치 않는 아이라는 걸 알게 된 키미는 엄마의 눈치를 보며 자랐다. 도시락을 싸주고, 야채와 과일을 챙겨 먹으라 잔소리를 하던 건 엄마가 아닌 키미였다. 키미가 그렇게까지 엄마를 보살폈던 건 버림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15년의 감금 생활을 겪고도 충분히 힘들어하기보다는 매일 매일 과장되게 웃고있는 것 역시, 화나는 일이 있을 때 화내는 대신 웃어버리는 것 역시 버림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 했다. 그게 키미가 갖고 있는 ‘관계의 문제’였다.
엄마와 확실하게 매듭 짓지 않으면 이런 문제가 계속 반복될 거라는 상담사의 말에 키미는 엄마를 찾아간다. 벙커에서 나온 이후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엄마. 엄마는 여전히 롤러 코스터 매니아였다. 수소문 끝에 한 놀이동산에서 만난 엄마는 키미를 끌어 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왜 자신을 열심히 찾지 않았느냐, 결국은 나를 버리고 싶었던 것이 아니냐, 하고 따져 물으려던 키미는 엄마의 눈물이 당혹스러웠다. 엄마가 나를 보고 울다니, 엄마가 나를 안아주다니. 그렇게나 갈구하던 엄마의 사랑이 손에 들어온 것 같아서.. 키미의 마음이 누그러졌다. 두 사람은 즐겁게 놀이동산을 누볐다.
하지만 갈등은 사소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안 가면 롤러 코스터를 못 탄다고 얼른 서두르라며 짜증을 내던 엄마가 신발끈을 묶고 있던 키미를 버리고 먼저 가버린 것이다. 엄마는 왜 신발끈을 묶어주지 않아? 엄마는 왜 내가 넘어졌는데 걱정도 안 해? 엄마는 나보다 롤러 코스터가 더 중요하지? 말을 모르던 시절부터 마음에 쌓여 왔던 물음표는 한 번에 폭발해 버리고 만다.
키미는 씩씩대며 달려가 엄마 옆에 앉는다. 그리고는 질주하는 롤러 코스터 위에서 분노를 쏟아낸다. “엄마는 내가 납치됐을 때 내심 좋았지? 나를 가졌을 때부터 싫어했잖아. 난 엄마한테 너무 화가 나. 그리고 나는 그럴 자격 있어.” 엄마에게 버림 받을 것이 두려워서 한 번도 표현하지 못했던 분노를 처음으로 시원하게 쏟아낸다.
키미의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네가 그런 마음인 줄 몰랐어, 미안해,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 라고 말하는 대신 씩씩대며 자기 이야기를 한다. “너 임신했을 때? 당연히 싫었어. 17살이었는데 내가 뭘 알았겠니. 그래도 어쨌든 낳았잖아. 네가 아플 때 한숨도 못자고 간호한 것도 나고, 너를 돌보느라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포기한 것도 나야. 어떤 미친놈이 널 잡아 가둔 건데 그것까지도 내 잘못인 거니?” 롤러 코스터에서 내려온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난 최고의 엄마는 아니었을 지도 몰라. 그치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단다.”
키미는 엄마의 말을 지적하려 하지도, 자신의 상처를 한 번 더 강조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엄마를 가만히 바라보던 키미는 이렇게 묻는다. “그런데 엄마. 엄마는 롤러 코스터를 왜 그렇게 좋아해?” 엄마는 대답한다.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질러도 괜찮은 유일한 장소니까.”
일단, 엄마와 확실하게 매듭 짓지 않으면 이 문제가 계속 반복될 거라는.. 극 중 상담사의 진단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관계 당사자와 해결하는 게 유효한 방법 중 하나일 수는 있어도 그게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저런 식의 ‘유일한 방법’을 강조하는 접근은 그렇지 못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결핍이 될 수 있으니까.
평생을 부모 때문에 고통 받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부모의 죽음을 완전한 해방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고통의 시작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부모가 살아 있을 때는 ‘제발 나를 좀 내버려 두었으면.’ 하고 생각하지만, 정작 부모가 죽고 나면 ‘그 때 나한테 왜 그랬어요?’하고 묻고 싶은 욕망이 점점 커진다고. 절대로 해소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욕망은 무척이나 고약하다.
당사자와 해결하는 게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 좋기야 할 테지만, 그게 곧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유일한 방법’에 대한 집착이야말로 더 해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일한 방법에 우리를 무리해서 구겨 넣을 필요는 없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우리는 우리의 유연함과 확장 가능성을 믿어야 한다.
키미는 자신의 분노를 표현하면 엄마가 사과할 거라 생각했다. 네가 필요로 하는 사랑을 넉넉하게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내가 부족한 엄마였다고, 그러니 용서하라고. 키미는 사과를 받을 마음으로 엄마를 찾았다. 그리고는 엄마에게 처음으로 화를 냈다. 버림 받으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며 엄마의 눈치를 보며 살았을 테니, 아마도 롤러 코스터에서의 저 장면이 키미 인생에서 처음으로 엄마에게 화를 낸 순간이겠지.
하지만 웬걸. 엄마는 열렬한 자기 변호로 키미의 분노를 되받아친다. 너를 키우느라 나도 나름대로 힘들었어, 하고 자기 인생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내가 완벽한 엄마는 아니었을지 몰라. 그치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거였어, 라는 이야기로 엄마는 이야기를 마친다. 엄마는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다. 키미는 끝내 사과를 받지 못했다.
나는 두 사람이 자기를 잃지 않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좋았다. 보통 저런 상황에서 나는 나를 쉽게 포기해버리는 편이라서.. 더더욱 느끼는 바가 많은 장면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과의 갈등 상황에서 나를 유지하며 타협점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나를 그냥 버림으로써 갈등이 없는 편을 택하고 만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마음을 달랜다. : 여기에 있는 나는 껍데기일 뿐이야. 어차피 잠깐만 참으면 되니까.
내가 키미 엄마 입장이었다면 나는 그냥 미안하다고 했을 것 같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제쳐두고 키미가 토로하는 슬픔과 막막함에 공감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겠지. ‘부족한 엄마라서 미안하다.’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을 것 같다.
그치만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게다가.. ‘내가 완벽하진 않았을지 몰라도 내 나름의 최선을 다한 거야.’라는 말은 나 아니면 해줄 사람이 없는데 말야. ‘내가 나를 지킬 수 없다’는 두려움은 어쩌면 이런 나의 버릇에서 비롯된 것일 지도 모르겠다. 내 편을 들려고 하기보다는 나를 내팽개쳐 버리는 버릇.
엄마의 이야기를 들은 키미는 엄마를 가만히 바라본다. 자기가 갖고 있던 문제의 근본적 원인이라 생각했던, 그러니까 자기 불행의 원흉이라 생각했던 그 사람이 조금은 달리 보인다. 그 역시 나름의 욕망을 가지고 나름의 상황 속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하며 살았던 한 명의 사람이다.
키미는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난다. 사람들 속에 섞여 있는 엄마를 본다. 무책임하게 노는 것만 좋아하던 엄마, 라고 생각하던 키미는 이제 와 새삼스레 묻는다. “엄마는 롤러 코스터를 왜 그렇게 좋아해?” 엄마는 대답한다.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질러도 괜찮은 유일한 장소니까.” 그래, 엄마도 사람이다.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그럴 곳이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롤러 코스터를 타게 된 한 명의 사람.
키미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제일 큰 상처를 준 엄마로부터 사과를 받기 위해 용기를 내서 엄마를 찾아 왔다. 하지만 엄마와의 대화를 통해, 키미는 엄마 역시 마음 속에 상처를 가진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당시에는 그게 엄마 나름의 최선이었음을 알게 됐다. 키미는 엄마에게 감사를 표한다.
“당신은 좋은 엄마가 아니었어. 봐, 자식 마음에 이런 상처를 남겼잖아.”하고 질책함으로써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려 했던 키미가 이제는 되려 엄마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그 때의 고맙다는 말 속에는 ‘힘든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줘서 고마워요.’ 라는 뜻이 담겨 있었겠지.
‘나에게 사과하세요’라는 마음이 ‘당신이 참 고마워요.’로 전환되는 순간, 키미는 엄마에게 버림 받으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던 아이의 그림자에서 빠져나온다. 키미는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는다.
위에 쓴 생각과 더불어 이런 생각도 했다.
1) 물론 세상에는 쓰레기 같은 부모들도 많다. 그저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당신이 참 고마워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니다.
2) 때로는 상처 그 자체보다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사람을 더 갉아먹기도 한다. 따라서 '모든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는 식의 패기 넘치는 태도보다는 '상처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다소 체념적이고 겸허한 태도가 도움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