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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글레 Jul 06. 2020

여백에 담긴 기적 같은 성장 이야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을 보고


형 코이치는 카고시마에, 동생 류노스케는 후쿠오카에 살고 있다. 같은 자리에서 잠들고, 같은 자리에서 눈을 뜨던 형제는 부모님이 이혼을 하게 되며 헤어지게 되었다. 코이치는 이혼한 부모님이 재결합하기를, 그래서 뿔뿔이 흩어진 가족이 한데 모이기를 바란다. 그것이 코이치가 바라는 기적이다. 그러던 어느 날, 흥미로운 소문을 하나 듣게 된다. 큐슈 전역에 고속 열차가 개통하는 첫날, 상행선과 하행선의 열차가 서로 지나치는 순간을 보며 소원을 빌면 기적처럼 그 소원이 이뤄진다는 것. 형제는 기적을 바라며 열차를 보러 길을 떠난다. 저마다의 소원을 가진 친구들이 그 길에 함께 하게 된다. 아이들은 열차가 교차하는 그 장면을 목격할 수 있을까? 열차가 교차하는 그 순간에 정말 기적이 일어날까? 아이들의 소원은 과연 이뤄질까?





고속 열차가 양쪽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다. 이제, 정신없이 열차가 지나가겠지.아이들은 목이 터져라 자기 소원을 외치겠지. 나는 자세를 바로 잡고 곧 있을 클라이맥스를 기다린다. 그런데.. 영화 전체에서 가장 빠르고, 가장 소란스러워야 할 바로 그 순간, 카메라는 그 여름의 순간들을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보여준다. : 파란색의 하늘, 연두색의 새싹, 어느 가족의 정다운 뒷모습, 하늘거리며 흔들리던 코스모스, 함께이던 시절의 우리 .. 


카메라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고, 그저 보여주기만 한다. 이 느슨함 속에서 나는 깊고 따뜻하며 살랑이고 너울대는 것을 느낀다.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많은 것을 전달하는 이 마법 같은 순간에 나는 [여백] 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아아, 그것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백이었다. 





"저 화산이 크게 폭발하면 좋겠어. 여기에서 살 수 없게 되면 예전처럼 우리 가족 넷이 오사카에서 함께 살 수 있지 않을까?" 


코이치는 기적을 바라는 마음으로 이 곳에 왔다. 하지만 정작 열차가 지나가는 바로 그 순간에, 그러니까 소리 높여 소원을 빌어야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코이치는 입을 꾹 닫아 버리고 만다. 갈라진 가족이 다시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라던 코이치는 가족이 따로 살 수밖에 없게 된 현재의 상황을 받아 들인다.


영화는 화산재를 쓸고 닦는 코이치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가족들이 모여 살던 오사카를 그리워하는 코이치에게 화산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의 상징이다. 맨날 화산재를 뿜어대는 화산도 이해가 안 가고, 언제 터질 지도 모르는 화산 옆에서 태연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도 이해가 안 간다. 학교가 언덕 위에 있는 것도, 가족인데도 떨어져서 살아야 하는 것도, 모두 이해가 안 간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코이치는 이제 현실을 받아 들인다. 영화 첫 장면에서 화산의 흔적을 지워버리려는 듯 화산재를 하염없이 쓸고 닦던 코이치는 이제 할아버지가 그렇듯 손가락에 침을 묻혀 화산재의 양을 체크한다. 그건 어렸을 때부터 화산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들의 습관이다. 코이치는 그렇게 화산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하나 둘 깨우치게 된다. 떨어져서 살게 된 동생과 인연을 유지하는 방법도, 엄마에게 새로 생긴 남자친구를 대하는 방법도, 아빠 안 계시니? 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답하는 방법도.. 그렇게 하나 둘 깨닫게 되겠지. 






류노스케의 친구 메구미는 배우가 되는 게 꿈이다. 하지만 엄마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안돼. 너에게는 무리야." 메구미는 그럴 때마다 엄마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도 하고 싶은데.. 나도 잘 할 수 있는데.. '여행에서 돌아온 메구미는 또렷한 목소리로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 난 아무래도 도쿄에 가야겠어." 메구미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보다는 현실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그 도전의 결과가 성공일지, 실패일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건 메구미가 자기의 의지로 결심을 했다는 그 자체다. 


코이치는 현실을 수용하기로 결심했고, 메구미는 현실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서로 다른 방향의 결심이지만 각자가 처한 환경 속에서 각자의 의지로 내린 결심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통한다. 서로 다른 아이들이 서로 다른 상황 속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성장해 나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로를 보듬어주고 응원해준다. 이거야말로 기적 아닐까? 





아이들은 여행을 통해 한 뼘씩 성장했다. 하지만 영화는 어떤 사건을 계기로 아이들이 변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게 개연성 부족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아이의 성장이라는 건 원래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일 테니까. 아무것도 없던 땅에서 빼꼼- 머리를 치켜든 새싹처럼. 너, 언제부터 피어 있었니 하고 묻고 싶어지는 수국처럼.


영화의 정점에서 호흡을 한 번 끊어가는 연출, 무언가를 가득 채워야 하는 순간에 모든 것을 비워내버리는 그 여백이야말로 아이의 성장을 담아내기에 가장 적절한 방법 같기도 하다.




영화 <진짜로 일어날 지도 몰라 기적>은 각자의 소망을 갖고 있는 아이들이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다. 고속 열차는 아이들의 소망을 그냥 지나쳐 가지만, 카메라는 아이들 곁에 머물며 따뜻한 시선으로 아이들을 바라본다. 우리는 그 온기 속에서 우리의 일상에 숨어 있던 작은 기적과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가능성의 기적을 발견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D_KVBSTjHc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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