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니엘 블레이크

by 은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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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고 어리석었던 나는 키스를 하면 사귀고 같이 자면 결혼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실은 그가 좋아서 키스했으면서 그렇게 핑계를 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학과 과를 선택할 때도 아무 생각 없이 했던 것처럼 결혼도 별생각 없이 엄마가 말리다 안 돼서 그럼 헤어지든지 결혼하든지 하라고 해서 결혼했다. 막상 결혼은 했지만 우리는 같은 배를 탄 동지라는 인식이 없었다.


배가 암초에 걸려 뒤집힐 지경일 때 우리는 서로를 외면했다. 나는 이후로 십 년쯤 당시의 상황을 곱씹으며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 지경까지 갔을까 생각했다. 처음에는 남편이 책임질 수 없는 일을 벌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체한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하는 일이 그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건데 내가 너무 안일하게 그와 선을 그어 생각했다고 반성했다. 결혼은 했지만 가족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어서 억울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죄라는 답을 얻었다.


하지만 다시 그 상황에 간다고 해도 남편을 막을 힘이 내게는 없었다. 그래서 보면 내가 잘못은 했는데 그를 막지 못한 게 잘못이 아니라 그와 결혼할 만큼 어리석은 게 잘못이었다는 새로운 결론을 냈다. 그리고 시간이 더 가고 나이가 들면서 나는 이게 잘잘못을 따질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일어날 일이 일어난 거고 내가 남편보다 더 나을 것도 없으며 우리는 어른들 말대로 그 밥에 그 국이었다.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추락한 남편과 나는 옥신각신 끝에 헤어지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 동생이 사는 곳으로 이사해 자리를 잡았다. 그 과정에서 내 부모님의 도움으로 방을 얻었고 동생이 나의 공공기관 계약직 일자리를 알아봐 주고 주민센터에서 차상위 계층 신청을 해 아이의 어린이집 비용을 감면받을 수 있게 해 줬다. 그러니까 나는 아무리 상황이 어렵다고 해도 결국은 도와줄 가족이 있었다. 곤궁에 처한 사람들을 보면 한 달만 넘길 수 있게 해주는 비빌 언덕이 있다면 저 지경이 되지 않을 텐데라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는 가족과 정부가 그 비빌 언덕이 되어 주었다. 어린이집 비용 감면받을 생각으로 신청했던 차상위 혜택은 매월 지원금도 있었고 이후 아플 때 병원비 보조도 컸다. 병원 치료를 마치고 다시 취업하면서 나는 수입이 있으니 더는 차상위 혜택을 받지 않겠다고 스스로 신청했다. 그때는 도움 받는걸 너무 당연하게 여겼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가족들에게도 제대로 된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고 지나간 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정부에서 받는 혜택은 당연히 감사하게 생각했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나오는 케이티처럼 되지 않으란 법이 없었는데 나는 우리나라에 태어나고 좋은 가족을 둔 덕분에 어려운 시절을 잘 넘겼다.


켄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영국 북동쪽 중소도시 뉴캐슬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 다니엘은 평생 성실한 목수로 살아왔다. 조현병이 있었던 아내가 죽고 혼자 살던 그는 심장병으로 쓰러지면서 일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질병 보조금 신청을 하면서 다니엘은 심장병과 관련 없는 질문에 투덜거렸고 결과는 어이없게 보조금 탈락이었다. 아내가 오래 투병하는 동안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터라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고 보조금을 받지 못하면 당장 먹고사는 일이 어려운 처지였다.


질병 보조금 대상에서 탈락하면서 다니엘에게 지옥이 펼쳐졌다. 보조금 탈락 고지 우편물을 들고 찾아간 기관에서는 전화가 먼저 오고 우편물이 오는데 전화가 오지 않았으면 전화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전화를 받은 이후에나 보조금 탈락에 대한 항고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럼 당장 어떻게 생활해야 하냐고 물으니 구직 수당을 신청하라고 한다. 의사가 일을 하지 말라고 하는 상황인데 질병 보조금은 탈락하고 구직 수당을 신청하라니 이건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반드시 인터넷으로 해야 하는 구직 수당 신청은 산너머 산이었고 구직 활동 증명을 위해 이력서를 돌리는 과정에 취업 기회를 준 업체에서 게으름뱅이라는 욕설까지 들어야 했다.


망망대해 돛도 없이 표류하는 배처럼 보이는 다니엘은 그 와중에 보조금 신청에 늦었다고 제재 대상이 된 케이티를 만나게 된다. 아이 둘을 키우는 젊은 엄마 케이티는 런던에서 미혼모 보호 시설에 있다가 열악한 환경에서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아 산만해지자 연고도 없는 뉴캐슬에 집을 얻어 이사했다. 돈이 없어서 전기도 끊긴 낡은 집에서 어떻게든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 케이티가 안쓰러웠던 다니엘은 그녀를 돕고 싶어 한다. 하지만 다니엘의 처지도 어려우니 케이티를 돕기에는 역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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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를 전문으로 진료하는 동물병원에 근무하며 한가한 시간에 글을 쓰는 중년입니다. 글쓰기를 통해 아프고 힘든 중년 시기를 잘 넘기며 노후 대비를 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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