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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 은 Jan 10. 2021

어둠의 목소리

알래스카 소묘

My fu**ing misearable life!


어느 이른 아침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시간 불 꺼진 빌딩 앞 구석 어둑한 그림자로부터 들려온 말이었다.

 

극지에 가까운 도시의 한 겨울.

이 도시에선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 일출까지는 몇 시간 더 있어야 한다. 그나마 낮게 깔린 구름막이 걷혀야 햇살을 볼 수 있는 계절이다. 한 밤중 같은 아침 8시, 이미 하루의 일상은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시작되었고, 장갑을 꼈어도 손가락 끝이 얼어붙는 날씨였다. 


. 인적 드문 거리 어둠이 구석구석 웅크리고 있는 그 시간, 빌딩 앞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려서던 참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어둠 속에서 미지의 생물 덩어리처럼 보였다. 한두 발자국 다가서면서 자세히 바라보니, 상체를 구부리고 뭔가 실랑이를 벌이는 자세를 한 백인 여자였다. 그림자의 정체가 백인 여자라는 것은 길 건너편 상점의 불빛이 마침 그녀의 등허리를 비추고 있었고, 찻길 너머까지 뻗친 불빛에 잡힌 여자의 머리칼이 구부정한 자세의 등에 널려있어서였다. 여자가 실랑이를 벌이는 것은 자전거였다. 빌딩 앞에는 자전거를 주차해 둘 수 있는 매대가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여자는 자전거를 붙들고 욕을 해대었다. 


그녀가 내지른 문장은 그날 내내 머릿속을 이리저리 쿵쿵 부딪치면서 울려 대었다. 그녀가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해댄 욕지거리였지만, 우연찮게 내 귀로 쑤시고 들어왔다. 내가 일면식도 없는, 나와 상관없는 그 여자의 불행한 삶의 목격자가 되어 버린 셈이었다. 그녀는 내겐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었다. 


 자신의 삶에 끔찍한 불행의 낙인을 찍는 사람의 하루를 상상한다. 그녀는 아마도 그날 아침 유독 제 말을 들어주지 않는 자전거에 욕지기나 났을지도 모른다. 분노와 짜증 섞인, 무의미한 푸념 같은 것이었을까.   


누군가의 삶이 "fu*ing miserable" 해지는 순간을 목격한다는 것은 그런 삶을 서사화한 영화를 한편 보는 것과는 또 다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리는 불행은, 현실에서 들려오는 저 절망의 목소리에 비하면 너무도 비현실적이다. 그 말을 내지른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세세히 몰라도, 목소리의 톤과 어투에서 생생한 불행을 감지할 수 있었고, 마치 그 삶의 핵심 요약본을 읽은 듯했다.  


이 도시의 다운타운에는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며 걷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얼굴은 대체로 불콰하고 입성은 추레하다. 구제품에서 골라 입은 듯한 점퍼와 바지, 목도리와 모자. 


올겨울 초입에 이웃 간에 공유하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누군가 요청을 했다. 추위가 몰려오니 양말을 기부해달라고 했다. 코스트코에 가면 싸게 구입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강의 나가는 곳과 한 빌딩에 있는 무료급식소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이웃이었다. 급식소에 오는 사람들에게 양말을 나눠준다고 했다. 또 다른 이웃이 답을 했다. 장갑은 필요하지 않나요?


 그렇게 누군가의 선의로 급식소에 오는 사람들이 따듯한 밥과 함께 양말과 장갑도 얻어 올 겨울은 동상에 걸리지 않고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 중에 그날 아침 자신의 불행과 마주했던 그녀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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