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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 은 Dec 27. 2020

자본의 슬픈 진실

라깡의 정신분석 - 충동의 운명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열심히 노력하면 하늘이 그 뜻을 알고 도와줄 것이라는 의미다. 성실하고 노력하는 자에겐 천운도 따르리라는 기원을 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늘은 종교적 신을 지칭할 것이지만, 제도 종교와 무관하게 하늘신이라는 세상의 이치와 섭리를 관장하는 존재를 가리킬 수도 있다. 정신분석이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하늘’의 자리에 ‘충동’을 대신해도 문제가 없으리라. 하늘을 충동으로 바꿔놓으면 스스로 돕는다는 표현도 새로운 문맥을 얻게 된다. 

  정신분석의 충동 이론에 개념분석의 토대를 제공한 원텍스트라 할 수 있는 프로이트의 논문 「충동과 그 변이」의 독일어 원제를 어원적으로 풀면 ‘충동과 그에 따른 운명’이라는 뜻이 된다. 충동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때 생기는 온갖 변형들로 구축된 운명의 길이 바로 인간 주체가 자신의 부여받은 생명을 다해가며 살아가는 인생의 궤적이란 의미이다. 


성공과 행복의 신기루를 좇으며 “자본주의의 슬픈 진실”(다니엘 콜린스)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충동이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에게 제공하는 ‘만족’을 깨닫지 못한다. 라깡과 밀러는 주체는 ‘언제나’ 행복할 뿐 아니라 그 만족도가 너무도 큰 나머지 불편하고 불만을 느낄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고 했다. 인간 주체가 매번 충동을 통해 만족을 경험하고 있다면 왜 여전히 우리는 더 불행하고 고통을 겪으며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는가?


  우리는 ‘빗금 친’(소외된) 주체이다. 각자의 자아 이상이 아무리 멀끔하고 완벽해 보여도 그건 욕망을 작동시키는 환상 속의 이미지일 뿐, 우리 존재가 거하는 실존의 매트릭스에서 우리 모두는 소외되어있다. 다만 그 소외의 실재를 가리기 위해 엉성하게 기운 환상의 옷을 걸쳐 입고 있을 뿐이다. 인간이 옷을 입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환상 역시 필요 불가결한데, 이 환상의 옷 아래로 충동이 작동한다. 


  우리 몸에서 작동하는 충동이라는 기묘한 현상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꼭 집어내어 말할 수 없을지 몰라도 막연하게나마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매 순간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포기하지 않고, 주체의 의식적 통제와 부인에도 불구하고 주체를 압박하는 그 무엇인가를.   

  인간 주체로서 우리에게 충동은 필연이다. 내 안의 뭔가, 내 욕망을 지속적으로 방해하는 그것, 그 필연적 기표가 있다. 나를 대타자와의 불완전한 결속으로부터 떼어내어 다른 운명의 길을 가게 해줄 그 무엇을 통해 나는 특별하고 고유한 존재가 된다. 내가 ‘나’로서의 참다움을 유지하는 것은 다른 무엇[학벌, 가문, 재력 등]이 아니라 충동과 주이상스에 기원한다. 하지만 모두가 충동이 제시하는 운명을 따르지는 않는다. 그건 당연하게도 각자의 선택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폴란드에 사는 베로니카는 천상의 목소리를 타고 난 성악가 지망생이다. 그녀의 재능을 인정받아 콘서트의 독창자로 발탁되지만 공연 도중 쓰러져 사망한다. 프랑스의 베로니카는 우연히 방문한 폴란드에서 도플갱어와 조우하게 되고 그 후 재능을 좇아 전문 음악가의 길을 가기보다는 평범한 인생을 택한 뒤 노쇠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다. 


이 이야기는 폴란드 출신 영화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가 1991년에 만든 아름다운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 인생>이다. 폴란드 베로니카의 죽음은 "정신분석의 충동은 죽음충동"이라는 정식을 예시한다. 베로니카는 무대 위에서 타고난 자신의 목소리를 최대한으로 뽑아 성스러운 노래를 부르다가 죽는다. 그녀의 고유한 존재가 절정에 달한 바로 그 순간은 그녀의 실존에는 치명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로니카는 그 운명에 충실했다. 프랑스의 베로니카가 선택한 삶은 지젝의 표현을 따르면 ‘윤리적 배신’에 해당한다. 정신분석에서 윤리란 도덕적 판단과 전혀 다른 것으로서, 주체가 자신의 고유한 존재에 충실했는가, 혹은 이 책의 언어로 말한다면 충동이 이끄는 길을 따랐는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여기서 어떤 삶의 행로를 선택하는가는 다시 한번 전적으로 개인 주체의 몫이다.   


무덤 안 어둑한 곳에 천으로 목을 묶어 매달린 채 죽어간 안티고네는 라깡에 의하면 죽음충동의 화신이다. 이런 안티고네의 고집스러운 의지를 그녀의 여자 형제 이스메네는 ‘으스스하다’고 표현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에 등장하는 두 여인의 운명은 이처럼 달랐다. 오빠의 시신을 매장하기 위해 절대 권위 왕의 명령을 어기는 일을 주저 없이 행한 안티고네와 절체절명 위기의 시대 몸을 낮추고 왕의 법령에 충실히 따르기로 선택한 이스메네는 영화 속 두 명의 베로니카가 각각 선택한 운명의 고전적 판본이다. 폴란드 베로니카와 안티고네의 이야기가 전해주는 것처럼 충동의 길은 21세기 초 자본의 지평에 어른거리는 성공과 행복의 이미지와는 판이하다. 어쩌면 우리는 프랑스 베로니카와 이스메네가 택한 선택지가 우리를 안전하게 성공과 행복으로 이끌 것이라고 믿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당신과 나의 기표는 $이다. 이 빗금 친 주체 기호 $를 파일에 입력시키기 위해 컴퓨터 자판에서 ‘달러’ 표시를 찾아서 누른다. ‘빗금 친’ 주체인 우리는 이렇게 자본주의의 낙인을 달고 살아간다. ‘빗금 친’ 주체는 소위 ‘정상인’이라고 부르는 존재를 가리키며, 이 상징계 내에서 인간이 존재하는 불가피한 형식이다. 주체에 균열을 낸 이 빗금을 없애기란 불가능한 기획이다. 상징계 너머에서 주이상스는 폭력적인 공포를 자아내며 우리를 공격해 들어오기 때문에 서둘러 기표와 환상으로 방어벽을 쌓아야 한다. 우리는 매 순간 주이상스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자신을 보호하려고 애쓰며 살아간다. 완전한 주이상스, 즉 완벽한 행복이란 불가능하며 초자아는 절대 제거되지 않는다. 다만 부분적으로 우리 몸에 장착된 충동의 파편들을 통해 우리는 다른 종류의 주체 시나리오를 쓸 가능성이 있다. 아주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이 충동의 윤리를 따라갈 때 어떤 운명이 기다릴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고 어떤 미래도 기약할 수 없다. 



  자크 데리다는 위트를 담아 인생에서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우리의 ‘끝’은 언제나 좋지 않다고 한다. 섬광처럼 화려한 불꽃으로 터져 나와 스러져가는 안티고네와 같은 존재가 된다면 그 ‘나쁜’ 끝을 조금 더 앞당기게 될 것이고, 안티고네와 정반대의 길을 선택한 이스메네 혹은 프랑스의 베로니카가 택한 길로 향한다고 해도 그 끝이 찾아오는 시간이 조금 늦추어질 뿐이다. 

다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울 것이고 충동은 변함없이 환상의 헐거운 솔기를 통해 만족의 회전운동을 지속할 것이므로 자본의 신기루를 향해 쳇바퀴를 돌리면서도 우리는 늘 ‘행복’하다.


  충동은 언제나 존재한다. 우리의 의식여부와 무관하고, 만족의 대상도 가려 고르지 않은 채 지속적으로 주체를 압박한다. 충동은 우리 몸 안에 남은 유아시절 모성과의 일체감을 통해서 경험한 쾌락의 흔적으로서 모성의 목소리와 시선, 손길과 품, 그리고 그녀의 몸에 달린 젖꼭지를 빨던 저 원시적 경험은 사라지기는커녕 우리 몸 곳곳에 파편적으로 흩어져 남아있다. 


 엄지손가락을 쉴 새 없이 빨아대는 이유기를 훌쩍 넘어선 꼬마 아이, 흰 종이 위에 물감을 뿌려대는 노회 한 화가, 속도를 높여 달려가는 자동차에서 환각에 빠지는 중독자들의 몸, 혹은 질 좋은 스테이크를 와인을 곁들여 먹고 난 뒤 이어지는 대화를 끝낼 줄 모르는 사교클럽의 신사숙녀들 사이에 충동이 있다. 어린 아들을 잃고 상심한 아버지의 꿈에서, 갓 태어난 어린 아들이 아내의 젖꼭지를 빠는 모습을 보고 질투를 느끼는 새내기 아버지의 복잡한 심정에서 충동은 소리 없이 인식하지 못하게 계속 작동한다. 


  종이 위에서 연필을 떼지 않고 사물을 그려보라. 어느 지점에선가 연필을 멈추고 ‘점프’를 해야 한다. 그래야 그림이 완성된다. 연필을 한 획으로 계속 이어나간 듯이 그린 것처럼 보이는 완성된 그림은 환상이다. 연필로 그린 밑그림은 여기저기 일어난 단락을 덧칠하고 덧대어야 그럴듯한 그림으로 완성된다. 연필선의 점프와 단락에 충동이 있다. 일단 시작한 인생의 그림을 완성하려 한다면 누구나 충동을 감당해야 한다. 완성으로 향해가는 욕망의 운동은 이 충동이 일으키는 단절, 파편화, 단락과 균열, 브레이크다운을 해결해가야 한다.

 사회가 제시하는 말끔한 플랜을 마다하고 제 길을 더듬거리며 찾아 나서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편재한다. 그저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자세히 보아야 보인다.’ 모두가 안티고네처럼 충동의 광채를 뿜거나 베로니카처럼 자신의 재능에 목숨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본주의적 주인 담론에서 분열의 주체가 되려고 기를 쓸 필요가 없다는 사실만 명심하자. 충동을 기억하고 말하라는 정신분석의 명령은 저 높은 곳에 실체로서의 일자를 놓아두는 대신 각자 내면의 충동을 ‘하늘’로 삼아 자기만의 고유한 운명을 따라가 보라는 제언이다.  

  언젠가, 아니 이미 벌써, 오래전 당신에게 보내졌으나 잊어버리고 있던 (혹은 도둑맞은) 편지 한 통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가 오면 편지에 담긴 낯설지만 매우 친밀한 충동의 속삭임에 잠시 당신을 놓아두기를. 








*이 글은 역자 서문의 일부를 발췌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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