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래스카 소묘 - 사라진 시간의 흔적은 언제나 곁에 있다
극지대에는 빙하가 있다.
몇 년 전 마타누스카 빙하에 갔었다. 9월 초였는데, 벌써 단풍이 한창이었다.
빙하를 직접 보게 되면 내 안의 인간적인 어떤 것이 갑작스럽게 정지하는 느낌을 받는다
인간이라는 것에 따라오는 문명, 문화, 사회와 지성, 윤리와 욕망 따위들이 빙하 앞에서 얼어붙어버린 듯 내 존재의 미미함을 느낀다.
그런 느낌은, 하지만 나약함이나 하찮음이 아니라, 어떤 경건함을 동반한다.
캘리포니아의 데쓰벨리에서도, 나이아가라 폭포에서도, 저 디날리의 광활한 툰드라 위로 솟은 산들, 유타주의 대형 아치에서도 이런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건 아마 내 속에 깃들어있는 자연의 일부로서의 본능이 작동하는 것 일터이다.
하지만 빙하 앞에서는 그런 무기력하면서도 초연 해지는 느낌이 더 강렬해진다. 주노에서는 그저 눈으로만 보고 밖에서 서성이기만 했는데, 마타누스카의 빙하에선 그 위를 걸어 다니며 손과 발이 얼고 입에서 뜨거운 김이 나오게 하는 얼음의 동산 안으로 자꾸 걸어 들어가는 나를 만난다.
정말 어쩌다 보니 여기에 와있다, 는 생각이 들었던 최초의 장소.
이곳에 처음 정착하기 위해 발을 디딘 지 일 년 2개월째. 난 그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먹고 자고 걷고 기회가 되면 사람들을 만나곤 했다.
일이라는 말로 내게 부여되는, 성취와 직위 따위로 나를 옭아매는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학교에도 나가지 않았다. 강의보다는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했다.
내게 감명을 주는 텍스트를 전혀 무감동인 학생들에게 들이대고 읽어보라고 느껴보라고 하는 일을 다시 한다는 것이 끔찍했다. 8년 전 강단을 떠나면서 얼마나 내가 후련해했는지 기억하려고 애썼다.
그런데도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어, 나는 학생이라 불리는 사람들 앞에서 뭔가를 열심히 떠들고 있을 때 가장 내 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발그스레 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수업이 끝나면 늘 허탈해지면서도 다시금 주섬주섬 강의 준비를 하곤 했었다.
그래도 강단은 지겹고 지루하며 지긋지긋한 곳임엔 틀림없다. 그곳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아직도 찾고 있다. 특히 알래스카에선 더욱더 탈출의 욕망이 강해진다. 왜냐면 강의실 도서관 연구실을 나서면 바로 그곳에 야생이 버티고 있으므로.
아무 데도 기대고 부빌대가 없이 철저하게 고독하게 만드는 야생의 세상.
이 곳에도 나뭇잎들은 색깔을 바꿔 입고 꽃이 피었다 지고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어느 틈엔가 달아나버린다.
알래스카에서 난 매일 살아있음을 느낀다. 생명의 환희로서가 아니라, 숨 쉬고 있다는, 아침마다 눈이 떠지고 팔다리가 움직여지고 장기가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런 매우 생물적인 살아있음을.
그리고 그 생 앞에서 경이로움에 빠진다. 알래스카라는 얼어붙은 땅덩어리, 수억만 년(?)의 빙하를 품고 있는 이 대지에서 매우 역설적으로 생은 지속된다.
이곳에서도 문명의 시간을 이어가고 있는 인간 혹은 그런 인간을 무심하게 대하는 듯한 이 야생의 자연, 이 둘 중 누가 더 위대하다고 해야 할까.
나는 자꾸 야생으로 도망치고 싶어 진다. 알래스카는 그런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