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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진 Feb 02. 2017

악마의 사진기가 담은 것.

'곡성' 잘못을 반복하는 관객들

<영화를 보신 분만 읽으세요>


일본인과의 통역을 돕는 '이삼'



상대의 언어(일본어)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이삼. '타자의 언어'라는 틀 안에서 대화한다는 것은 꽤나 불리한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더욱 두렵고 방어적이게 되었을까. 그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그도 그 자신만의 언어(종교적 언어)를 통해 일본인을 대하기 시작한다. 그 첫 번째로써 일본인을 '귀신'이라고 부르는 대신 '악마'라고 부른다(가톨릭 신자의 개념의 틀 안에서 일본인은 '귀신'이 아닌 '악마'일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를 자신의  개념의 틀에서만 생각한다는 것은 그 안온함만큼이나, 객관에서 멀어지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너는 내가 악마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내가 악마라는 너의 판단을 확인하기 위해 온 것'


이미 객관성에선 멀어졌으며, 자신만의 틀로 생각하는 이삼에게 이 말은 비수처럼 꽂힐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두려움으로 가득 찼기에 이런 말들은 그저 귀를 스친다. 그 순간 일본인은 이삼의 두려움 가득 찬 얼굴에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사진이란 아마도 '사실'을 의미할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담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본인이 담은 사진은 무엇이며, 사실은 무엇일까. 담는 것은 두려워하는 이삼의 얼굴이며, '사실'이란 자신을 악마라고 의심하는 마음일 것이다.(이 장면까지는 일본인은 악마의 모습이 아닌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일본인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여기서 '사실'이란 내가 '악마'라는 것이 아니라, 악마라고 확신하는 너의 '의심과 두려움'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일본인이 악마로 보이는 것은 이삼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허상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스크린 밖에 존재하는 관람객이니, 두려움도 의심도 내려놓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일본인은 정말 악마인가? 악마로 보이는 것인가? 또한 처음부터 악마였던 것인가? 아니면 떨어져 죽은 이후에서야 악마가 된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몇 장면을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오른쪽은 절벽에 매달려있다 떨어져 고통받는 모습이고, 왼쪽은 차에 치여 죽은 일본인의 시체를 또 한 번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확인사살을 하는 장면이다. 왼쪽의 사진을 보면 그는 매우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어딜 봐서 악마인가?.라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가정을 해볼 수 있을지 모른다. 


(가정) '그는 악마가 아니었으며 '종구'가 죄 없는 일본인을 의심하고 죽였기 때문에 떨어진 이후에야 악마로 환생한 것' 


이 가정의 결론을 당겨 말하자면 이렇다. 곡성의 모든 사건들은 일본인이 한 것인지, 무명이 한 것인지는 알 수없다. 물론 일광이 일본인과 동료이지만 사건과 관계가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우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일본인이 악마가 되었기 때문에 모든 사건들을 일본인과 일광의 짓이라고 단정하지만, 그는 그저 죽은 자의 제사를 지내기만 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의 커다란 의심과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로 인해 악마가 되었던 비극적 인물일지 모르는 것이다. 





니딸의 아비가 남을 의심 하고, 죽이려 허고, 결국 죽여버렸어


무명은 그렇기 때문에 종구의 딸은 벌을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대사 이후로 들어서면 '악마'를 찾는 일과 기묘한 사건들의 원인을 찾는 일은 별개의 일이 되어버린다. '남을 의심하고 죽이려 하고 끝내 죽인 사람'을 벌하는 것은 '선'의 책무인가?'악'의 책무인가.라는 질문으로 연결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무명의 이 대사와, 일본인의 사진기는 끝내 종구의 잘못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타인을 이유 없이 '귀신'으로 매도하고 그를 죽인 잘못 말이다.  그렇다면 마을에서 일어난 기묘한 사건들을 이렇게 정의해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타인에게 의심받고 매도당했던 자들이 좀비가 되어 죽었던 사건'이라고 말이다. 결국은 안 좋은 소문들이 마을 사람들을 악마로 만들고 죽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크린 밖을 벗어난 관객들 조차 '완벽한 해석'이라는 글을 올리면서 일본인을 악마로 간주하고 있다. 나홍진 감독은 '타인에 대한 의심의 죄'를 영화로 만든 듯 하지만, 관객들은 영화관 밖에서 또 한 명의 사람을(일본인;비록 영화 속 인물이지만) 악마로 확신하고 죽이고 있는 것이다.  왜 우리는 스크린 너머 한 발짝 떨어져서 <곡성>의 사건을 지켜보면서도 이성적이지 못한 걸까. '완벽한 해석'이라는 글들에 대한 환호는 결국 종구의 잘못과도 다르지 않은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벌을 받는 것은 종구의 딸이다. 왜일까.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타인을 의심하고 비방하는 사회를 만들면 결국 그것으로 고통받는 것은 우리의 다음 세대(아이들)라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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