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꾸준 Nov 01. 2022

어쩌면 우리는

2022-03-12(토)_나홀로 음악에서 영감받아 글쓰기

너는 따뜻한 커피를 주문했다. 나도 따뜻한 커피를 주문했다. 어색함에 커피를 한 모금 마시려고 했으나, 방금 나온 커피는 너무 뜨거워서 입에 대지도 못했다. 커피가 식을 때까지 기다리며 나는 너에게 말을 했다. 처음 만난 너는 말이 별로 없었다. 나는 계속 말하고, 너는 계속 들었다. 나는 뜨거워서 입에 대지도 못했던 커피를 너는 벌써 반이나 마셨다.


"아 혹시, 집에 급한 일 있으세요? 제가 눈치 없이 계속 말을 붙였나 봐요."

"네? 급한 일 없어요. 저 시간 많아요."


너는 영문을 모른 채 나에게 대답했다.


"그 뜨거운 커피를 벌써 반이나 드셨길래요. 저는 입도 못 댔는데."


나는 슬며시 웃으며 너에게 농담을 건넸다. 너는 너의 커피를 보더니 얼굴이 살짝 붉어지더니 미소를 보였다.

 

"제가 원래 뜨거운 거 잘 마셔요."


그렇게 너는 처음 만난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 이 날 이후 만난 너는 뜨거운 음료를 주문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


"아니, 빙수를 7분 만에 다 먹는 사람이 어딨어? 나는 아직 한 입 밖에 못 먹었는데."


너는 빙수가 나오고 7분 만에 다 먹었다. 너는 내 얼굴을 한 번 보고, 빙수 그릇을 한 번 보더니 입을 가리고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게 웃었다. 내가 말이 너무 많아, 말을 하는 사이에 너는 빙수를 먹었다. 내가 한 입 밖에 먹지 못한 빙수를 전부 너가 먹었다.


"그러게 빨리 먹었어야죠."


너는 웃으며 나를 구박했다. 말이 많던 나는 빙수는 많이 못 먹었지만, 덕분에 너는 그래도 크게 웃었다. 너는 나중에 말했다. 부끄러워서 빙수를 먹었고, 먹다 보니 어느새 다 먹게 되었다고. 그렇게 나와의 만남을 수줍어하던 너였다.


-


"아 보인다. 끊을게."

"아! 끊지 마 오빠!"

"응? 왜?"

"끊지 마!"


우리가 멀리서부터 통화를 하면서 걸어올 때면, 바로 앞에서 서로를 안아주기 전까지 전화를 끊지 않던 너였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나와 함께 대화하고 싶어 했던 너였다. 처음 만난 너는 말이 없었지만, 연인이 되어 만난 너는 많은 말을 했다.


"오빠, 보고 싶었어."

"어제도 만났잖아?"

"그래도 또 보고 싶었어. 오빠는 나 안 보고 싶었어?"

"나도 보고 싶었지."


너는 표현을 많이 했다. 나를 좋아한다는 표현을 많이 했다. 하지만 나쁜 표현은 많이 하지 않았다. 서운한 것도, 속상한 것도 그저 혼자 삼키는 너였다. 나는 너가 나에게 서운한 것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지금은 너무도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그것을 그때의 나는 몰랐다.


-


"이걸로 계산해주세요!"

"아니야. 오빠가 살게."

"아니야 됐어! 내가 사줄 거야! 이걸로 해주세요!"


너는 밥을 먹고 나올 때면 서둘러 계산대로 향했다. 혹시나 내가 먼저 카드를 내밀면 그 카드를 빼앗아 너가 계산하고는 했다. 내가 사주겠다고 하면 됐다고 힘까지 쓰며 막는 너였다. 내가 너를 사주기 위해서는 화장실 가는 척하면서 몰래 계산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너는 이미 계산이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나면 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너의 표정이 좋았다.


-


"오빠! 오늘도 고생 많았어."

"내가 너무 늦게 전화했지?"

"괜찮아. 드라마 보고 있었어."

"마저 봐야 되는 거 아니야?"

"내일 어차피 또 재방송해."


알바를 하다가 늦게 끝나면, 내가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던 너였다. 보고 있던 드라마를 미루고 나와 전화를 하던 너였다. 특별한 일은 없었는지, 기분 나쁜 일은 없었는지 항상 궁금해하던 너였다. 밥은 뭘 먹었는지. 어떤 반찬을 먹었는지. 맛은 있었는지. 지금은 배가 고프지 않은지. 궁금해하던 너였다. 그럼 나도 너의 안부를 물었다. 밥은 먹었는지. 뭘 먹었는지. 맛은 어땠는지. 매일 크게 다를 것 없는 나의 일상을 궁금해하던 너였다.


-


"난 오빠랑 결혼할 거야."

"진짜?"

"응, 그러니까 나 버리지 마."

"무슨 말이야. 내가 너를 왜 버려. 그런 걱정 하지 마."


나와 결혼하겠다던 너였다. 너를 버리지 말라고 하던 너였다. 나도 너와 결혼하겠다고 생각했다. 나와의 미래를 그리던 너였다. 나도 역시 너와의 미래를 그렸다. 서로가 그렸던 미래가 같았던 그때였다.


-


나의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던 너였다. 친구들을 만날 때, 내가 정신이 없어 챙기지 못한 친구도 챙겨주던 너였다. 내 친구들과의 첫 만남에 내 친구들의 이름을 미리 전부 외우고 왔던 너였다.


"혹시 실수하면 어떡해."


내 친구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던 너였다.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던 너였다.


-


난 너에게 선물을 내밀었다.


"너무 비싼 거 산 거 아니야? 나 못 받아."

"무슨 말이야? 너 주려고 산 건데, 받아."

"나는 선물 안 샀는데."

"괜찮아."


너는 선물을 열어보았지만, 표정이 밝지 않았다. 너가 갖고 싶어 하던 향수였는데, 너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고마워 오빠."


너는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특별한 날이면 언제나 편지를 써주던 너였다. 따뜻한 말이 한가득 쓰여 있던, 귀여운 하트가 가득했던 편지를 써주던 너였다. 나와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어 했던 너였다. 오늘은 편지를 받지 못했다. 너는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정말로 괜찮았다.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


"오빠는 아직도 내가 좋아?"

"그럼. 당연하지. 왜? 너는 아니야?"

"모르겠어. 아직도 좋은 건지."


나는 불안했다. 이미 나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변한 너를 나는 알고 있었다. 애써 외면하던 것을 너가 꺼내 놓았다. 사실 나는 이것을 벌써 꺼내 놓았어야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 항상 짜증이 나있던 너였다. 기념일에 선물을 준비하지 않던 너였다. 편지를 쓰지 않던 너였다. 나의 선물에 기뻐하지 않던 너였다. 드라마를 보기 위해 전화를 끊던 너였다. 나와 함께하는 시간을 줄여가던 너였다. 나를 만나는 것을 귀찮아하던 너였다. 나보다 친구들과의 시간을 더 많이 보내던 너였다. 잠은 잘 잤는지, 출근은 잘했는지, 밥은 먹었는지 궁금해하지 않던 너였다. 보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않던 너였다. 사랑한다는 말을 꺼내지 않던 너였다. 결혼은 하지 않겠다는 너였다. 그 어느 순간부터 너는 그런 너였다.


"익숙해지고 편해지는 것이 사랑 아닐까?"


너는 그저 나에게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라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너가 말했듯이 익숙함에 속지 않겠다고. 그렇게 말하는 너를 바랐던 나였다.


"그냥, 오빠가. 아주 편한 그냥 아는 오빠 같아."


내가 바라던 너의 모습과 너가 바라던 나의 모습은 뒤엉켜버렸다. 그래서, 이렇게 아픈 것이다.


"나는 이렇게 변했는데. 오빠는. 여전히 똑같아."


나는 변하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의 설렘이 끝나도 그때와 같이 변하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너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변한 자신의 모습이 옳지 못하다고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외면하던 것을 이렇게 꺼내서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자신은 잘못되었으니, 나에게서 이별을 꺼내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결국 이별을 꺼내지 못했다. 아니 꺼내지 않았다.


-


너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내가 오빠 붙잡고 있는 것 같아서. 미안해."


사실 이 관계를 붙잡고 있는 것은 나였다. 이미 마음이 떠난 너를 놓지 않고 붙잡아 두었던 것은 나였다.


"이제. 그만하자. 우리."


그렇게 이별을 말하던 너였다. 나는 붙잡지 못했다.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고, 생각은 하얗게 변했다. 너는 아직 뜨거워 김이 오르는 커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도 딱히 바라볼 곳을 찾지 못해, 한 모금밖에 마시지 않은 커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가 말하지 못했던 나의 서운함들이 복받쳐 오르면서 마음과 다르게 나는 너를 밀어내기로 했다.


"그래. 좋은 사람 만나. 너가 정말로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런 말 하지 마 오빠."


너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는 크게 숨을 쉬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너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걸어두었던 두꺼운 코드를 입고는 가방을 들었다.


"잘 지내 오빠. 먼저 갈게."


너는 나의 대답을 듣지 않고 나갔다. 그때 내가 너를 붙잡았다면 너와 더 오래 앉아 있었을까. 아직 식지 않아 뜨거운 이 커피가 식어서 한 입에 마실 수 있을 때까지 함께 앉아 있을 수 있었을까.


-


잔을 들어 절반이나 남아 있던 커피를 모두 삼켰다. 처음 커피가 나왔을 땐 너무 뜨거워서 입도 대지 못했는데, 어느새 차갑게 식었다. 잔도, 커피도 전부 차갑게 식었다. 카페의 문이 열릴 때마다 들어오는 공기도 차가웠다. 너와 처음 만났던 이 카페가 차가웠다. 그렇게 나 혼자 남겨진 작년 크리스마스의 이 자리는 차가웠다. 1년이 지나 앉아 있는 지금 이 자리도 차갑다. 그때 내가 널 밀어내지 않았다면, 그때 내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그때 내가 너를 조금 더 이해했다면, 그때 내가 너를 조금 더 사랑했다면, 그때 내가 너를 조금 더 참았었다면, 우린 이 차가운 계절을, 어쩌면 아직도 함께 하고 있었을까. 어쩌면 우리가 다음 계절을 함께 했을까. 어쩌면 우리가 모든 계절을 함께 했을까. 어쩌면 너를 못 잊어서 바보같이 아직도 널 그리워하는 나는 없었을까.

keyword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