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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름지기 Dec 15. 2022

피니쉬 라인

가을밤 달리기의 단상

올 가을, 거의 2년 만에 달리기를 다시 시작했다.


임신과 출산, 육아로 한참 쉬었던 달리기를 다시 하게 되기까지 엄청나게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결국 결과적으로 시작을 하니 몸의 감각들이 되살아났고 적당히 숨이 차고 심장이 두근거림을 체감할 때 직감적으로 느꼈다.

 

'역시, 이거야. 이게 내가 가장 좋아하던 순간 중 하나였어.'


특히 11월 초 가을밤의 달리기는 잊을 수 없는 순간을 선물해줬다.

이때의 느낌을 정말 잊고 싶지 않아 더 상세히 기록해두자면-

 

11월 9일 밤 10시경, 잠실 한강공원에서의 달리기.


10월 중순 오랜만에 첫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꾸준히 연습해 내년 봄에 열리는 10km 마라톤에 참가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다. 더 나아가 한 번씩은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해인이 유아차를 밀면서 달려볼까?' 하는 (내 지금 러닝 수준엔) 엉뚱한 상상도 해보곤 했다. 이 날도 봄날 마라톤의 생동감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며 기분 좋게 달리다 몇 년 만에 10km를 멋지게 완주해낸 내 앞에 저 멀리 피니시 라인이 보이고 남편 품에 안긴 해인이가 해사하게 웃으며 나에게 손을 흔드는 상상을 했다. 생각만 해도 미소가 새어 나와 반대편에서 뛰어오던 사람들한테 이상하게 보일까 싶어 헛기침도 몇 번 해보고 짐짓 표정을 유지해보려 애쓰던 차에 문득, 해인이가 피니시 라인에 자기 두 발로 서 있는 모습이 둥실 떠올랐다. 


'그래, 내년 봄쯤이면 해인이가 설 수 있을지도 몰라.'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마자 옆에 서 있던 가로등 불빛이 폭죽처럼 펑-하게 빛나고 깜깜했던 한강 주변이 일순간 환하게 밝아지는 것 같았다. 재활치료를 잘 견뎌낸 해인이가 피니쉬 라인에 두 발로 우뚝 서서 아빠와 함께 손을 흔드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제껏 내 인생에서 이룬 그 어떤 성취보다 몇 곱절 더 기쁘고 벅찬 감정이 가슴속으로 물밀듯이 몰려들어왔다. 머릿속의 그 모습이 너무 행복해서 눈시울이 시큰해지고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콧물까지 훌쩍이며 달리다 문득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설사 그때까지 해인이가 못 선다고 해도, 그래도 또 상관없어. 그건 그것대로 또 괜찮아. 내 달리기와 해인이의 서는 행위는 병렬적인 별개의 사건이고 내가 그 시간 동안 달리기를 하며 행복하고 성장한다면 그걸로도 괜찮을 거야.'


지난 1년간 해인이가 성장시킨 '나'라는 사람이 결국 가닿은 생각은 그것이었다.


나는 시간의 힘을 그리 체감하지 못하며 살아온 성마른 사람이다. 무언가에 진득하게 오랜 시간 공을 들인 시기도 때때로 분명 있기는 있었으나 대체로는 늘 벼락치기 인생이었다. 최단기간 최대의 인풋을 쏟아부어 최고(혹은 최적)의 아웃풋을 뽑아내는. 


그러나 해인이를 통해 하루하루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시간의 합이 모이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를 알게 되었고 모 아니면 도, 성취 아니면 실패라고 생각했던 편협한 시각에도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예전의 나였다면 '아, 그런데 해인이가 그때 혼자 못 서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내가 그때 가서 실망할까 두려워 그런 상상은 바로 머리에서 지워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낌없이 상상하고 마음껏 행복해하고, 설사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됐다. 시간의 힘을 믿고 결과에 초연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해인이가 피니쉬 라인에 서 있는 상상 자체도 기뻤지만 그 상상 끝에 떠오른 '설사 그렇지 못하다 해도 괜찮아'라는 생각이 더 반가웠다.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한 발 한 발, 나로서도 내 안의 소중한 자아인 부모로서도 성장해 나가다 보면 내 인생의 행복한 피니쉬 라인도 맞을 수 있겠지.


오늘도 또 그렇게 마음껏 상상하고, 행복해하고 설사 그렇지 못하다 해도 다 괜찮다고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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