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내의 스피커를 통해서 울려 퍼지는 자신의 목소리를 모든 사람이 좋아하고 들을 것이라는 착각이 매일 점심시간에 그녀를 대학방송실로 오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것이 착각이라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방송실 동아리를 시작했던 새내기부터 지금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졸업이라는 현실을 자각하고 취업이라는 현재에 얽매이게 되었던 4학년 여름 방학이 되어서야 방송인의 착각이 특별한 스타성을 갖게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모든 교우들이 매일 점심시간이면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지금은 자신을 알고 기억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모두들 사회로 진출하기 위해서 머리를 싸매며 다른 것들은 생각할 여유조차 없는 시기였다. 학우들이 그녀의 얼굴을 힐끗 보며 그녀로 하여금 스타성을 느끼는 순간이 없어졌다는 것을 그녀는 이제야 알았다. 지난 대학생활은 빛나는 청춘에서 보물 중의 보석이었으며 앞으로는 가질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갑자기 쓸쓸함을 느낀 그녀는 가방을 싸서 방송실로 향했다. 방송실에는 새내기들 몇 명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며 즐겁게 깔깔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과 인사를 하고 두고 간 물건을 가지러 왔다고 말하며 이곳저곳을 뒤적이다가 후배들과 인사를 하고 나와 버렸다. 마냥 좋았던 방송실 동아리 모임방이 서먹해지는 분위기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청춘의 특권이라는 티켓의 유효성이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방송실을 나와서 한 개 층을 더 올라가서 위층으로 가는 계단에 걸터앉아 핸드폰을 보았다. 버스나 전철을 타면 거의 모든 사람이 손에 든 핸드폰 화면을 보기 위해서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다. 이처럼 그녀 역시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꺼내어 이것저것 손가락으로 터치를 하면서 화면을 뒤적였다.
그러다 광고성 썸네일에 ‘한반도의 목소리 방송을 아십니까?’라는 문구가 화면에 떴다. 보려고 하기보다는 무심결에 손가락이 터치되어 화면이 구동되더니 빨간 깃발과 함께 얼굴이 익은 두 사람의 상반신 옆모습이 보였다. 그랬다. 북한을 선전하는 인터넷 방송이 광고성 모바일 앱과 연결되어 그녀의 핸드폰에 화면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계단에서 복도로 이어지는 모퉁이에서 왁자지끌 하는 소리가 방송실로부터 들리는 것 같았다. 후배들이 저네들끼리의 수다스러운 미팅을 끝내고 나오는 소리였다.
동시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혹시나 한반도의 목소리 방송으로 인해서 스미싱을 당할까 봐 화면으로부터 빠져나오려고 리튼스위치를 계속 누르며 후다닥 핸드폰을 초기화면으로 되돌렸다.
그러면서 모퉁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후배들과 계단에 앉아있던 자세에서 멈칫 일어나는 그녀의 얼굴이 서로 마주쳤다. 그녀는 겸연쩍었다. 선배언니가 시간을 보내려고 계단에 앉아서 핸드폰만 만지작 거리는 모습이라니... 갑자기 그녀는 자존심이 상했다는 기분을 느꼈다. 선배는 언제나 후배들에게 무게감을 보여주며 듬직한 후배들의 뒷배가 되어야 한다는 어렴풋한 권위적 자만심이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방송실에서 고참이 되고 난 이후부터 그룹 속에서 주인공처럼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하지만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취직 문제로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던 요즘, 그녀는 순간과 즉흥이라는 행동이 본능에 따라서 움직인다는 것을 알았다. 깊은 생각 없이 몸에 밴 습관이 그냥 나타나는 것이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질과 행동이 무의식 중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무의식을 더욱 강하게 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자기가 중심이고 무게 추라는 것을 어린애의 자의식에 심겨주었다.
그러한 자긍심은 커 가면서 자존감으로 변하고 때때로 청춘의 도도함이 한껏 빛을 낼 때는 자신도 모르게 상대방에겐 자만심으로 비추어진다.
2. 접속
모든 것은 불평등했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과 권력에 의해서 계급이 나누어져 있지만 자유라는 개념으로 인식되어 있는 개인의 활동은 계층 간의 구분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다. 우리가 재벌 2세를 보면 그들은 그들의 사회 속에서 산다는 것을 인정해 버린다. 그것이 무의식적인 계급의 인정이다. 나의 자유가 제한되거나 억압되지 않는 이상 그들만의 리그에 대해서는 의심 없는 관망자가 될 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젊음은 토착화된 사회적 계층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젊음이라는 인식이 기득권의 고리타분함을 인정할 수가 없기에 무모한 도전도 해보는 것이다.
시험 기간에 잠깐 휴식을 취하며 노트북으로 자료를 뒤지다가 ‘한반도의 목소리’라는 북한의 인터넷 방송에 연결되어 의도치 않게 그 화면을 잠깐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이 국가정보원의 인터넷탐색상황반에 포착되어 나의 기록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스파이 드라마나 첩보 영화를 많이 본 탓에 저절로 떠오르는 연상작용일 수도 있었다.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지만 북한에 대한 상상이나 호기심은 없어진 지 오래였다. 우리가 경제규모에서 월등하고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북한의 실상에 대해선 미디어 매체를 통해 훨씬 많은 정보들이 이미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었다. 그러니 호기심이라는 단어조차도 떠올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경험해 보지 않았던 일들에 대해서 미리 상상하며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험과 탐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며 그런 젊음이 그녀에게 있었다.
개인의 정보가 담긴 노트북 컴퓨터나 모바일폰이 국가의 통제하에서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섬뜩한 느낌을 어떻게 표현하고 나타낼 수 있을까? 시민의 사상과 행동을 들여다보는 체제의 존재를 국민들은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것이 무의식적 일상이라면…
3. 스미싱
언제부턴가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거나 메모를 작성할 때 문자가 잠깐씩 흔들리거나 화면이 떨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녀는 메모리를 클리닝 안 해서 그런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갈수록 그런 현상들이 빈번해진 것 같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노트북으로 ‘한반도의 목소리’라는 사이트에 우연찮게 접속했던 이후에 핸드폰에 화면이나 문자가 떨리는 이상 현상이 생긴 것 같았다. 개인 정보와 사적 일상을 거울을 보듯 들여다보는 존재가 있을 수 있을까,하는 막연한 의심이 생겼다.
그러다 문득 학교 방송국 황선배를 떠올렸다. 그 선배라면 나의 엉뚱한 의심을 해소해 줄 것 같았다.
황인성. 그녀가 입학했을 때 그는 졸업반이었다. 항상 후배들에게 웃음을 보이고 4학년다운 어른스러움이 말과 행동에서 나타났다. 어쩌면 그의 태도는 새내기인 그녀가 처음 겪는 대학 생활이기에 4학년이라는 노련함이 묻어나는 여유일 수 있었다. 그 여유로움의 해이함이 황선배를 실수로 이끌었다.
그것은 대학 생활의 마지막 학기 때 벌어진 일이었다. 여자 친구와 함께 저녁 늦게 방송실에서 그냥 시간 보내기를 하다가 갑자기 분위기가 뜨거워져서 방송 기계 앞에서 사랑을 나누었는데 방송 스위치를 켜지는 쪽으로 건드리는 바람에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소리가 교내에 울려 퍼졌다. 그것도 모르고 그들은 짙은 사랑을 나누었다. 늦은 저녁에 가로등이 켜진 캠퍼스의 교내 스피커에서 나오는 남녀의 신음 소리는 섹스쇼를 연상케 할 만큼 흥분을 일으키는 소리였다.
결국, 그 사건에 대해서 교수인 교무 처장과 교육부 파견인 행정실장 등 관련인들의 회의 결과, 한 달간 정학으로 징계가 이루어졌지만, 그 사건 이후로 그가 받은 학교의 징계는 학교 서류상 기록으로만 남게 되었다. 왜냐하면 황선배는 마지막 학기를 취업 인턴사원 활동으로 등록을 해놓았기에 정작 본인의 학사일정에서 차질은 없었다. 그러나 상대방 여학생은 학기 중 그것도 시험기간이 겹쳐진 정학 기간이라서 한 학기를 더 다녀야 했다.
그 사건 이후로 황선배의 소식은 한두 번 들었었다. 핸드폰 직영대리점을 운영한다는 소문을 들었었다. 피 끓는 청춘남녀의 사랑나눔이 죄가 될 수 있는 학교가 진리와 자유 탐구라는 기본 가치를 학생들에게 내세울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사랑나눔에 대한 죄를 굳이 묻는다면 아마도 방송기기 오작동 실수죄라고 생각하는 게 맞을 것이다.
4. 포매팅
그녀는 수소문하여 황선배를 찾아갔다. 일산 신도시 중심가에 ○○핸드폰 직영대리점이라는 간판이 있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니 진열대 뒤편에서 손님에게 뭔가를 설명하는 황선배가 보였다.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선배의 얼굴은 그대로였다. 사회 초년생 시절 동안은 대학생 4학년의 얼굴이 당분간 그대로이다. 왜냐하면 대학교 3학년에서 4학년이 되는 순간 원숙함과 노련함이 얼굴에 나타나 그때 이미 수년의 시간을 늙어버린 채 사회로 나서기 때문이다. 4학년인 그녀도 수년 늙은 노련함의 태도를 나타내고 있었다. 손님이 물러나자 그녀는
“선배, 안녕하세요?”
그는 그녀를 보자 기억이 나지 않았는지
“누구?”
“방송국 후배 김민혜입니다.”
“김... 민... 혜...”
잠시 머뭇거리며 생각을 하더니,
“아하! 민혜구나. 반갑다. 졸업하고 나서 방송실에 간 적이 없어서 얼굴이 금방 떠오르지 않았어, 미안”
“선배, 사실은 의심스런 게 있어서 확인해보고 싶어 불쑥 찾아 왔어요.”
그녀는 우연히 자신이 접속했던 사이트 이름과 그 이후로 핸드폰이 버벅거린다는 말을 했다. 또한 평상시와 다름없이 핸드폰을 사용하는데도 데이터 사용량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고 대리점 한켠의 2층 계단 경사 밑에 가려진 공간이 있었다. 그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고 함께 들어갔다. 그 공간은 의외의 장소였다. 보통은 청소도구함이나 스페어 창고로 사용 됨직한 공간이 내부는 1층과 2층의 계단참의 공간과 함께 넓게 확장되어 있었다. 책상 서너 개는 충분히 놓을 수 있는 여유로운 장소였다. 그곳 한쪽에 모니터 3개가 올려져 있었고 그 책상 옆에 조그만 깜빡이 등이 빨갛게 반짝이는 통신기기처럼 보이는 기계들이 서너 개 정도 겹쳐져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핸드폰을 컴퓨터에 연결하여 시스템 파일을 컴퓨터 화면에 펼쳐 보이며 무언가를 열심히 찾았다. 그리고 그는 의심되는 어떤 프로그램 코드를 찾아내어 그것이 몇 개나 있는지 그리고 그것과 연결된 코딩들을 체크하였다. 연결된 프로그램 문장 속에서 broadcast라는 코드도 찾아내었다. 그는 시스템 파일에 스파이웨어가 심어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메일 주소만 알면 그 포탈을 이용해서 회원가입 시 등록해 놓았던 그 사람의 모든 인적사항을 알아내지.
이메일 주소는 네가 접속한 한민족의 목소리 방송에서 쌍방향으로 연결되게 스파이웨어를 심어서 너의 컴퓨터에 있는 모든 것을 들여다 보고 개인 신상과 일상 정보를 캐내는 것이지.
또한 컴퓨터와 핸드폰 심지어 인터넷과 연결된 너의 방의 모든 캠을 작동시키거나 기록을 할 수 있지.
개인사찰이 명백한 불법이지만 일반인으로서는 모르는 영역이니까 그런게 있는지조차도 인식을 못하는 거지. 그리고 개인적으로 감시를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또 아는 방법도 없지.”
선배의 말을 들은 그녀는 첩보 영화나 스파이 드라마에서 나오는 그런 장면들이 연상되었다.
황선배는 뒤이어 말했다.
“프로그램 구조가 복잡하고 세부적으로 모든 것을 수정할 수 없으니 핸드폰을 초기상태로 포맷시키는게 가장 좋을 것 같아. 어때?”
“그렇게 해주세요.”
선배를 만나서 인사하고 서로 간 잠깐의 근황을 묻고 나서 계단 밑의 여유 공간으로 들어와서 그녀의 핸드폰을 그의 컴퓨터에 연결하여 체크한 지 30여 분 정도 흘렀을까. 핸드폰이 초기화되었고 사소한 물건과 방을 정리하는 사이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핸드폰 대리점 점원이 경찰이 왔다고 사장님을 찾는다고 했다. 그는 문 밖을 나가보니 지구대 경찰 2명이 보였다.
“신고가 들어와서 잠시 여쭙겠습니다. 혹시 불법 무선 주파수를 사용하셨나요?”
“아니요.”
경찰은 주소와 대리점 등록증, 대표자 인적사항 등을 확인하였다.
경찰들의 질문은 흔히 있는 질문들이 아니었다. 그냥 시간을 끌려는 무의미한 질문들이었다. 가게의 개점일이 언제냐? 점원은 몇 명이냐? 무슨 제품이 인기가 있냐? 자급제 폰은 어떻게 해야 가장 싸게 구입하느냐? 등…
선배는 귀찮은 듯 질문에 답하면서 물었다.
“그런데 왜 그런게 필요하지요?”
그의 질문에 경찰이 이런저런 말로 대화를 이어가는 중에 말쑥한 정장 차림의 중년 두 명이 가게로 들어왔다. 그들은 경찰들에게 신분증을 보이자 경찰들은 뒤로 물러서며 수고하시라 말하고는 가게를 떠났다.
중년의 사람들은 그에게 작업실을 보여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선배는 뭐 때문에 이러느냐고 물으며 거부의사를 나타내었다. 중년의 사람 중 한 명이
“저희는 한국 통신관리 감독자들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파통신 보안관리 체계를 담당하는 국가 공무원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그에게 신분증을 보여주며 선배를 설득하는 말로 대리점에서 개인적으로 사용하고 운용하는 컴퓨터를 보여달라고 하였다. 선배는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보여줄 이유도 당위성도 없었다. 그들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어디엔가 전화를 걸었다. 그러면서 앞서 경찰들이 했던 것과 같은 부류의 질문들로 선배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돌아갔다. 그들은 필요하다면 영장 없이 긴급 수색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들 같았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을 때 뭔가 다른 지시를 받았으리라 생각되었다.
5. 현실적인
그녀는 초기화된 핸드폰을 들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시험도 끝나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취업에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하고 여기저기 원서를 내고 취업 정보를 얻기 위해서 학교에서 개최하는 설명회도 참석하였다. 그리고 뛰어다닌 결과, 그녀는 TV드라마를 만드는 스튜디오 업체에 인턴으로 들어갔다. 입사하고 1년은 금방 지나갔다. 공부를 하는 것이든 일을 하는 것이든 밤을 새우며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견디어 내는 것도 아직 젊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신을 환경에 맞추어 나갔다.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소속감이 주는 의무는 어쩌면 개인의 권리를 더욱 공고하게 하는 선결 조건일 수 있다. 시스템이 주는 개인 생활의 안정은 책임 있는 자유와도 같은 의미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방송실 동아리 동기들과의 모임은 간혹 가졌다. 그러다 어느 날 모임의 대화 중에 황인성선배의 소식을 물었다. 동아리 동기 중 한 명이 그 선배는 조그만 지역 방송국 PD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친구는 그의 전화번호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검색사이트에서 그 지역 방송국을 검색하여 대표전화번호를 알아내었다.
그리고 어느 날 오후 그녀는 방송국에 전화를 걸었다.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보통 회사의 대표 전화라면 여성직원이 받아서 안내와 설명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녀는 선배의 이름과 소속부서를 말하고 바꿔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여 혹시 중간에 전화의 연결이 끊길 수도 있으니 소속부서의 직통번호도 알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 남자는 부서별 직통번호는 없으며 대표전화를 통해서 교환된다고 하였다.
잠시 후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황인성님 계시면 통화하고 싶습니다.”
“접니다.”
“선배님, 저 김민혜예요.”
“어어, 김민혜. 오랜만이네.”
“잘 계시는지요. 그동안 연락 없이 이렇게 불쑥 안부전화 드려요.”
“응, 그래 고마워.”
“선배님 보고 싶어 전화했어요. 언제 시간 되세요? 점심 함께 하고 싶어요.”
그는 그녀가 불현듯 왜 전화를 걸었는지 짐작을 할 수 있었다. 1년 전 핸드폰 대리점을 운영할 때 그녀의 핸드폰에서 스파이앱을 발견하고 초기화를 시킨 적이 있었다. 아마 그 이후의 소식이 궁금했으리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어느 토요일 오후 시내의 한 음식점에서 그녀는 그를 만났다. 대학교 때 같은 동아리의 선배와 후배라는 연결고리는 형식적인 만남을 뛰어넘는 친밀함이 있었다. 그것이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연결고리 중의 하나인 학연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궁금했던 그 사건 이후의 일을 물어보았다.
선배는 1년 전의 그 일이 있었던 이후 그 사람들이 가게로 다시 왔다고 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를 물었는데 특히 국가관과 안보관 그리고 세계관까지 묻더라는 것이었다. 무슨 면접을 보는듯한 느낌이었고 질문이 일반 회사 입사 시 하는 질문과는 다른 시스템적인 거창한 물음이었다고 했다. 젊은 시절엔 누구나 개혁진보가 되고 늙어서는 모두가 보수가 된다고 한다. 그랬다. 그 당시 선배는 그나마 자기 철학이 확고하게 있어서 신념을 나타내는 웅변은 할 수 있었다. 그것이 개똥철학이었다고 할지라도 상대방이 묻는 국가관, 세계관, 안보관 등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확고한 자기 신념을 나타내었고 그것이 플러스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그는 그 사람들로부터 제의를 받았다. 국가공무원 8급 특별채용이라는 제의였다. 선배는 의아한 생각에 이번엔 선배가 먼저 그 사람들과 연락하여 다시 만났다. 그리고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스파이앱을 풀어서 오픈한 사람이 궁금해서 선배를 찾았고 그리고 그 정도 실력이면 우리 회사에 소용이 닿을 것 같아 내부 회의를 거쳐서 특채를 결정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스파이앱은 오픈을 하게 되면 바로 회사의 감시컴퓨터와 자동연결되어 오픈한 장소의 위치가 표시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이 선배 가게에 들이닥친 것이다. 시간이 걸리니까 우선은 지구대 경찰을 보내어 시간을 끌고 뒤이어 회사원이 출동한 것이라고 했다.
그녀의 핸드폰에 심어진 스파이앱은 한민족의 목소리라는 북한 매체에 접속한 것이 회사 감시컴퓨터망에 포착되었고 안보적 측면에서 우선 파악을 위해 회사의 업무 순서대로 그녀의 핸드폰에 스파이앱이 깔렸던 것이라고 했다. 일정 기간의 감시 후 이상징후가 없으면 스파이앱을 제거해야 하지만 그대로 두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그녀의 경우는 후자였다. 그리고 대외비인 그 회사의 이름은 “한민족 공동체 방송”이라는 지역방송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배의 특채를 결정한 가장 주된 이유는 돈과 인력이 드는 감시와 통제보다는 자기 조직에 끌어들여 재능과 머리를 활용하는 편이 시스템 전체로 봐서 이익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여러 가지 철저하게 신원조회는 거쳤을 것이다. 과거에는 신념이라는 관념적 투쟁이 우선이었다면 지금은 생활비를 벌기 위한 노동이 현실적 일상이다. 자기표현보다 자기만족이 우선인 시대인 것이다.
그 모든 인간형의 공통적인 것은 한 개의 꼭짓점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결국 자기만의 독특한 것을 가지고 있을 때 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특별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자격증이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