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국수를 만들면서 깨달은 것
일을 그만 둔지 6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집밥만으로 끼니를 해결한지도 6개월 차다. 가끔은 엄마가 만들어준 반찬으로 밥 먹는 주제에 음식 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똑같은 반찬으로 삼시세끼를 먹다보면 먹는 재미를 잃는다. 물론 엄마에게 직접 투정부리진 않는다. 그 정도로 철없진 않다. 그냥 스스로 투정을 부릴 뿐이다. 나름 해결책으로 중간에 라면을 끓여 먹거나 한다. 그러나 그마저도 몇 일 못 간다. 그래서 결국 요리를 하게 됐다.
요즘은 날이 더워지고 있어서 그런지 시원 새콤한 것이 먹고 싶어졌다. 그래, 이런 날엔 비빔국수다. 그런데 비빔국수는 만들어 본 적이 없다. 늘 엄마가 해준 것만 먹어봤다. 쉬고 있는 자에게 나오는 여유 덕분인지 비빔국수 요리에 도전했다. 엄마에게 레시피를 물었다. 엄마는 고추장, 간장, 설탕만 적당히 넣으라고 했다. 그래, 우리 엄마 레시피는 늘 계량되어 있지 않다. 맛보면서 적당히 넣는 것. 그것이 엄마 스타일이다. 아무래도 계량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인터넷에 레시피를 검색해봤다. 적당한 비율로 설명된 레시피를 참고해서 비빔국수 한 그릇을 완성시켰다.
새콤한 빨간빛이 도는 비빔국수를 예쁜 그릇에 담았다. 명쾌한 소리를 내며 후루룩 한 입 넣었다. 오물오물 씹고 삼켰다. 국수를 삼킨 뒤에도 남은 양념의 맛을 계속 반추했다. 그런데 어딘지 아쉬운 맛이었다. 분명 맛은 엄마의 비빔국수와 닮았는데 알 수 없는 부족한 맛이 느껴졌다. 다른 양념으로 채울 수 있는 부족함이 아니었다. 깊이를 더해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국수를 곱씹다가 깊은 맛의 부재는 엄마표 손맛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퇴근 후 돌아온 엄마에게 비빔국수 이야기를 했다. “내가 만드니까 엄마가 해준 깊은 맛이 안나. 역시 엄마의 손맛이 들어가야 한다니까!” 엄마 손맛을 연신 극찬했다. 나의 칭찬에 엄마는 비밀 하나를 알려줬다. 그것은 손맛의 비결이 아닌 요리의 비밀이었다. “원래 요리는 자기가 직접 하면 맛이 없어. 만드는 동안 이미 음식에 질리거든. 그래서 나는 내가 하는 음식 맛없어”
엄마의 말을 듣고 비빔국수를 만들던 때를 다시 떠올려봤다. 딴딴한 소면이 뜨거운 물에 끓으면서 내 몸도 뜨겁게 절여진다. 시뻘건 김치를 썰면서 이미 빨간 맛을 눈으로 맛본다. 양념장을 섞어낼 때마다 간을 보느라 혀는 이미 짠 맛으로 데워진다. 완성된 요리를 먹을 땐 이미 내 눈과 입은 음식을 미리 경험한 상태였다. 맛과는 별개로 음식이 주는 감동이나 반전은 아무래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면 우리 엄마는 그동안 무슨 맛으로 집밥을 잡수셨을까. 내가 늘 극찬하는 엄마표 손맛을 엄마는 느끼지 못했다. 그 사실이 조금, 아니 많이 씁쓸했다. 그래도 다시 생각해보니 함께 밥 먹을 때마다 엄마가 지은 희미한 미소를 기억한다. 두 딸래미들이 맛을 감탄하며 신들린 리액션을 선보일 때마다 엄마는 손사래치셨지만 그 뒤로 희미한 미소를 짓곤 하셨다. 엄마는 손맛 대신 리액션 맛을 추가하여 맛을 음미했을지도 모른다. 밥상은 누군가의 손맛과 누군가의 리액션 맛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한때는 자유로운 삶을 상징하는 1인가구의 삶을 동경했다. 간섭도 제약도 갈등도 없는 자유로운 삶.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그런 삶을. 그런데 요리를 해보니 나는 절대 혼자서는 못 살 인간이다. 나에겐 손맛도 리액션 맛도 필요하다. 누군가 나를 위해 손맛이 담긴 요리를 해줬으면 좋겠고 때로는 내가 만든 요리에 리액션 맛을 더해줬으면 좋겠다. 그래야 먹는 즐거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요리를 하다가 깨달았다. 나는 혼자만의 자유로운 삶보다는 관심 섞인 관계가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을. 내가 만드는 것, 내가 잘하고 못하는 것을 옆에서 관심 가져주는 사람이 집에 있었으면 좋겠다. 칭찬은 좋고 간섭은 싫지만 칭찬이 더 많다면 살아볼만 하다. 간섭도 사랑 섞인 간섭이라면 참을만할 것 같다. 손맛, 리액션맛, 칭찬, 간섭은 절대 혼자서 만들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동거인이 있는 삶을 살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