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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슬비 Feb 27. 2020

빌리 홀리데이의 이상한 열매(Strange Fruit)

재즈계에는 3대 디바가 있다. 엘라 피츠제럴드, 사라본, 그리고 빌리 홀리데이다. 그 중에서도 빌리 홀리데이는 유난히 짧은 생을 보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짧은 생마저 지독한 시간들의 연속이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지독한 삶은 사망 원인명 하나로도 느껴지기도 한다. 사인은 바로 약물중독이었다.



빌리는 아마 생의 많은 시간을 약물이 가까이에 있는 곳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녀는 매춘으로 생을 이어가던 흑인 여성의 딸로 태어났다. 부모의 나이는 겨우 열 넷이었다. 부모의 양육안에서 자랄 수 없었기에 그녀는 떠돌아다니며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다. 떠돌아다니는 삶 가운데, 마약상들 혹은 거리에서 마약하는 사람들과 잦은 접촉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환경은 그녀가 마약에 손을 대는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주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녀의 마약중독이 알려진 것은 첫 번째 남편과의 결혼 실패 이후다.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은 심각한 마약 중독자였다. 빌리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마약 복용에 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후에 빌리는 마약 복용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사망한다.


약물중독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한 빌리의 삶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나는 그녀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긴 힘들었다. 나는 약물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삶을 살았기에 약물이 근처에 도사리는 삶이란 어떤지 알 수 없다. 또한 나름의 안정적인 보호와 양육 안에서 자라온 나의 알량한 윤리적 토대는 빌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찝찝함을 주고 말았다. 적어도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남편 문제에 있어서 좀만 더 현명해질 순 없었을지 교만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음악가로써 명성을 얻기 시작한 이후부턴 그녀 스스로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 선택만을 할 수 있었을거라 생각했다. 그녀의 안타까운 삶을 100% 이해했다면 그것은 100%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다시금 생각해본다. 거리를 떠돌아다니며 보낸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상상도 이해도 할 수 없는 삶이었다. 열살 남짓한 때 백인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것도 모자라 오히려 불량하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가야 했다. 먹고 살기 위해 그녀 역시 매춘의 길을 선택해야만 했다. 하지만 흑인 남성의 성행위 요구에 순응하지 않아 매춘행위로 다시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 어느 쪽이 더 지옥인지 알 수 없을 지독한 두 곳을 유년시절동안 보내야 했다. 


그녀에겐 삶을 갱생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듯 했다. 하지만 음악을 만난 것은 그녀의 지독한 삶을 구원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매춘을 하지 않아도 돈벌이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며 살지 않아도 되었다. 게다가 명성을 얻기 시작하면서 백인들과 함께 한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인종차별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공연중에 백인 관객들로부터 오는 조롱이 끊기지 않았다. 무대가 끝난 뒤엔 백인과 같은 호텔에서 머무를 수 없는 차별을 겪어야 했다. 


음악을 만나기 전과 후에도 똑같이 시달려야 했을 차별과 억압, 그리고 어느 것으로도 채워본 적 없을 사랑은 여전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빌리는 눈에 보이는 누구라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의지했을지도 모른다. 좋은 남편을 고르는 분별력이란게 그녀에게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녀는 3번의 결혼과 실패를 겪는다. 과연 그녀의 삶에서 행복을 확장해 나아갈 수 있는 기회란게 있었는지 다시 생각해본다.  



빌리 홀리데이 - Strange Fruit

https://youtu.be/Web007rzSOI


그녀의 대표곡 ‘Strange Fruit’를 들으면 빌리의 삶이 애절한 목소리가 되었다는 것이 느껴진다. 가사의 내용을 알고 들으면 그녀의 삶이 흑인들의 삶으로 확장된다. Strange Fruit는 흑인들을 죽이고 나무에 매달곤 했던 백인들의 잔인한 차별과 폭력을 비유한 내용이다. 빌리라는 1인분의 그릇에 수인분의 흑인들의 삶의 열매가 담겨있다. 어쩌면 내가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은 빌리의 삶을 딱 그녀 1인분만큼의 삶으로만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그녀도, 다른 흑인 여성들도 모든 비극적 상황을 스스로 끊어내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삶이 어떤 곳에선 보편적인 삶이었다. 부끄럽게도 한 명의 특수한 아픔이 보편이 될 때 그 삶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에게 이 곡은 흑인 사회의 아픔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개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윤리적 잣대가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내 아픔만 크고 나의 윤리적 잣대만 고상했던 생각이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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