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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슬비 Apr 04. 2020

[영화리뷰] 파수꾼: 기태는 왜 죽어야만 했을까?


고등학생 한 명이 자살을 했다. 그의 이름은 기태다. 기태의 아버지는 아들이 왜 죽었는지 알고 싶다. 그래야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태와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을 한 명씩 만난다. 영화 <파수꾼>은 이렇게 시작한다.



기태의 곁에는 친한 친구인 희준과 동윤이 있다. 이들에게는 어느 날 오해가 하나 싹이 튼다. 오해를 마주한 기태의 행동은 서툴다. 사건을 정확히 마주하기보단 감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기태는 그냥 없던 일로 치고 어물쩍 넘어가고 싶다. 그러나 오해는 더 큰 오해를 낳고 문제는 점점 더 풀기 어려워진다. 결국 기태는 자신이 가진 힘과 권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희준과 동윤은 폭력을 앞세운 기태의 알량한 행동을 보고서 참을 수 없다. 그리고 관계를 끊어낸다. 작은 오해가 쌓여 만들어진 거대한 짐은 기태를 무겁게 한다. 기태는 끝내 자살을 선택한다.


기태가 자살하기 전, 기태는 희준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었다. 하지만 희준은 기태에게 전학이라는 복수로 관계를 끊어냈다. 문제가 점점 꼬이면서 기태는 동윤을 찾아간다. 기태는 동윤에게 어디서부터 잘못이었는지 물었다. 그러나 동윤은 모든 탓을 기태에게 돌렸다. “처음부터 너만 없었으면 돼.” 희준과 동윤은 점점 커져버린 오해의 상황에서 더이상 상처받기 싫었다. 그래서 모든 탓을 기태로 돌렸고 스스로를 방어했다. 기태의 죽음에 각자의 책임이 실렸다. 오해조차 정확히 마주하고 풀 줄 모르는 이들이 기태의 죽음을 제대로 마주할 리 없다. 그래서 자신들을 찾아온 기태의 아빠에게 사건에 대하여 침묵한다.  


아들의 죽음을 추적하는 아빠의 모습은 세 청소년과 상반된다. 아빠는 기태의 죽음을 정확히 이해하고 싶었다. 누군가를 탓하거나 책임지게 할 생각도 없다. 그저 사건을 역행하며 어떤 일이 있었는지 풀어낼 뿐이다. 그래야 아들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생님과 반 친구들을 차례대로 만나고 나서 기태의 가장 친한 친구가 희준과 동윤이란걸 알게 된다. 사건의 진실이 코 앞에 다가왔지만 희준과 동윤은 침묵한다. 그러나 아빠는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침착하게 이야기 한다. “제일 친하다는 친구 둘이, 그 중에 하나는 갑자기 전학가고, 하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장례식에도 안오고. 기태하고 뭔가 관련이 있는 것 같긴 한데. 그저 너하고 다른 애들이 뭔가 좀 숨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내가 너무 과도한 거니?”


사건 해결이 눈앞에 다가왔지만 결국 이 사건은 해결되지 못한다. 여전히 기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희준과 동윤은 마음 한 칸에 죄책감과 복잡한 마음을 끌어안고 평생 살아갈 뿐이다. 영화는 청소년들의 서툴고 날 선 감정을 섬세하게 담아냈다. 이들은 자신에게 문제가 닥쳤을 때 그것을 어떻게 진단하고 해결해야하는지 방법을 모른다. 이성적 판단보단 감정이 앞서고, 경험이 적어 문제 해결의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방법을 모르는 이들은 문제를 외면하거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등 자꾸만 엇나간다.


이들은 왜 자꾸 엇나갈까. 사건을 들춰내면 낼수록 각자 스스로 가지고 있는 약점이 보인다. 기태에겐 엄마의 부재가, 희준에게는 연약한 힘이, 동윤에게는 여자친구의 소문이 그랬다. 이들은 자신들의 약점이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났을 때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그것은 분노로 표출된다. 약점은 감추고 자신의 힘을 내세울 것, 문제가 생겼을 땐 덮거나 탓을 할 것, 약점을 드러내는 순간 책잡히기 쉽고 지는 것이라고 어디선가 늘 듣고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에겐 약점을 받아들이고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강인한 내면이 없다.

기태, 희준, 동윤과 같은 청소년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 넘쳐난다. 방법이 엇나간 청소년들은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청소년 범죄의 처벌이 너무 약하다며 강한 처벌로써 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사회는 청소년 범죄문제를 두고서 구조적인 해결 방안을 마련하려고 한다. 문제가 심각한 만큼 강력한 처벌은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구조적 문제만이 답이 아니란걸 영화가 말해준다.


청소년의 내면은 단계적으로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들의 내면엔 성숙해지지 못한 채 멈춰있는 구간이 있다. 멈춰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어른들이 바로 거기에 멈춰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세계 역시 약함은 늘 감춰야하며 힘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한다. 상대방의 약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커녕 비교를 통해 안심하고, 때로는 그것을 이용한다. 이런 사람들이 자신에게 문제가 닥쳤을 때 이성적으로 해결할리 없다. 때론 누군가를 용서해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용서하지 못하고 복수를 한다. 물론 세상엔 그렇지 않은 현명하고 성숙한 어른들도 많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가 마주했던 어른들 대부분이 어리숙했고, 문제해결 또한 무력으로 행사하곤 했다. 아이들 내면이 성숙해지려면 어른들도 함께 성장해야 한다. 누군가의 약점을 이용해먹지 않고 문제가 발생했을 땐 성숙하게 해결해야 한다. 감정보단 이성으로 판단하고 내 약점이 드러나도 사건을 정확히 마주할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어른이 많지 않아서일까 세 청소년들처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자꾸만 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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