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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TJ K직장녀 May 16. 2023

지독하게 불편한 12월

나의 애도일지 2편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는 호주의 대표적인 휴양 도시 골드코스트에서 회복과 애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지극한 편안함과 서울이라는 시공간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자니 별거를 시작했던 12월을 떠올리자면 대체 어떻게 그 지독하게 불편한 시간을 견뎌냈었는지 전혀 가늠이 되질 않는다. 나만큼 그도 불편하고, 본인이 갑작스레 짐을 꾸려 나갔던 만큼 어쩌면 그가 더 힘들었으리라고도 생각한다.


그가 그렇게 단출하게 짐을 꾸려 나간 12월은 연말이었다. 연말이라는 점을 당연히 우리는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막상 단기 임대를 급하게 구하자니, 안에 살림살이며 필요한 것을 당장에 앞날도 모르는데 채워 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생각보다 월세가 만만치 않았다. 숙박업소나 에어비엔비를 이용하자니 연말이어서 방이 여의치 않을뿐더러 지나치게 비싸고 띄엄띄엄 예약이 가능했다. 시댁이 서울이고 그의 방은 그대로 있으니 시댁에 들어가라고 해도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 계신 노모의 집에 지내면서 얼굴 붉히고 싶지 않다'는 그의 말을 이전 같았으면 설득하고 싸워서라도 내가 납득이 갈 때까지 이야기를 하려고 했겠으나 나는 곧장 수긍했다. 별거를 제안하고 결정했을 때 나는 이제 정말로 우리 관계는 서로를 설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렇게 지독하게 불편한 12월의 반동거 반별거 형태의 주거 생활을 하게 되었다. 마음은 이미 무너져 황폐한 사막인데 우리는 때때로 어색한 침묵 속에서 한 시공간을 공유해야 했고, 누가 언제 나가서 언제 들어오는지, 이 작은 집을 누가 어느 기간부터 어느 기간까지 사용하고, 나는 친정에 그를 위해 언제 가 있을지 이런 무미건조한 대화를 하는 것 또한 이 과정의 일부였기에 복잡하고 지난했다. 별거를 하기로 결정하고 서로 각자의 생각과 마음을 정리하는 와중인데 함께했다가 떨어졌다가 하는 게 서로의 감정에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내게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이 사실은 별거를 결정한다고 해서 쉽게 변하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가 미워서, 내 결혼 생활과 젊음이라는 시간의 헌신이 너무 억울해서 악이라도 쓰고 오열하고 저주하고 싶다가도 떨어져 있을 때는 그의 안위와 평온한 하루가 걱정되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재잘재잘 내 일상을 공유하고 싶은 욕구에 휩싸이곤 했다. 또 습관은 참 무섭다. 함께 하루 이틀 보내게 될 때는 혼자서는 밥을 잘 챙겨 먹지 않는 그의 모습에 짜증이 나는 것을 꾹 참으며 '샌드위치라도 먹을래?'라고 넌지시 묻고, 또 막상 해주니 잘 먹는 모습을 보며 안심하는 내 모습이 이상했다. 낯설었다. 그도 습관적으로 당신의 빨래 - 즉 속옷 - 같은 것을 내놓았고, 그것을 보는 나는 짜증이 솟구치다가도 '그래 5년 동안 했는데 이걸 왜 못해 주겠어. 같이 하고 말지'라고 그의 빨래를 챙기곤 했다. 부부들은 싸우면 으레 각방을 쓰거나 혹은 한 명은 소파로 쫓겨나고는 하는데, 나는 우리의 별거는 이제 하루 이틀 일이 아니고 계속될 일이었으므로 한 사람이 피곤한 생활을 해서는 안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우리는 예전처럼 말없이 킹사이즈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잠을 청했다. 아주 한편으로는 그가 내 옆에 여전히 잠들어 있는 것에 안심되기도 하는 정 반대의 감정을 겪기도 했다. 그리고 또 아침이면 일어나 가정에선 이렇게 남보다 못한 형태의 부부생활을 영위하고 있는데 아무렇지 않게 각자 일터로 나가 사회인으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가 지나치게 불편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나의 행동과 감정선을 줄곧 관찰했다. 그리고 이상하다고 여겨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배회하며 걷고 또 걸으며 생각에 빠지다가도 가족이기에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생각하곤 했다.


이혼을 하고 지금까지도 가장 크게 겪고 있는 것, 그리고 생각건대 가장 오랜 시간 이겨내야만 할 감정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바로 '상실감'이다. 팔 하나, 다리 하나 잃은 기분. 이것이야말로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이해시키기 어려운 감정이다. 가장 가깝고도 먼 사이, 사랑하지 않으면 헤어지면 '남'인데 어떻게 내 혈육을 잃은 것 같은 감정일까. 5년가량의 시간을 함께 시공간을 공유했으니 그저 내 삶의 일부로 스며든 탓이다. 사실 아직까지도 그가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나는 내 근황을 그에게 계속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하기 때문이다. 근래 그가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시도한 일, 내가 모르는 노란색 이쁜 티셔츠를 입고 공원에서 사진을 찍은 일, 그의 안경 쓴 모습을 좋아하던 내가 늘 사줬던 안경테 대신 새로운 안경을 맞춘 일, 그리고 내가 모르는 타투를 내가 볼 수 없는 그의 몸에 새겼단 이야길 듣는 일. 내가 모르는 것들이 많아지는 것에 때때로 놀라고 생경한 감정에 쓸쓸하다가도 익숙해지려 하는 중이다. 내가 모르는 것이 내가 아는 것보다 더 많아지는 날도 머지않아 오겠지. 이게 내가 겪는 '상실감'의 일종이고, 현재 버전이다. 앞으로 또 이 감정은 다양한 형태로 변하리라. 그렇게 아직까지도 그의 일부는 여전히 내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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