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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TJ K직장녀 May 20. 2023

나도 몰랑몰랑해질 수 있어

나의 애도일지 4편 - Part 1

남쪽 바닷가 근처 시골과도 같은 작은 동네에서 나고 자라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여름이라는 계절을 사무치게 사랑하여 겨울이면 따뜻한 섬나라로 떠나곤 했다. 더욱이나 외국계 기업인 현재 직장은 12월이면 겨울 방학처럼 연말을 맞아 다들 휴가를 내고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 그때에 맞추어 파워 J인 나는 12월 셋째 주 주말을 끼고 6일간의 필리핀 보홀로 겨울 방학을 이미 6개월 전부터 예정해 둔 상태였다. 물론 이런 일들이 닥칠 거라고 예상한 것은 아니었다. 마치 미리 짜 놓은 것처럼 잘 된 일이었다. 극도의 감정적 긴장으로부터의 휴식과 해방 그리고 그와의 거리감이 필요한 상태였고 그에게도 12월의 별거를 위해 숙소를 옮겨 다니던 도중 오롯이 혼자 집에서 편히 쉴만한 기회였다.


나는 삼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모든 것에 늘 열심이고 진심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매사에 에너지를 쏟아왔다. 그것은 내 삶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대하는 디폴트 태도값처럼 되어버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늘 불안이 엄습해 왔다. 무언가 굉장히 중요한 것을 빠뜨린 사람처럼 초조했다. 나는 늘 유년기부터 내게 충분하다고 말해주지 못하는 결핍된 부족감으로 가득찬 사람이었다.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내 머릿속에는 늘 여행을 가기 전부터 여행지의 지도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고 다녀온 사람보다도 무얼 해야 하는지, 무얼 먹어야 하는지, 무얼 사야 하는지 이미 잘 알고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이폰 캘린더에는 주요 일정의 시간까지 표기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고, 모든 예약과 의사 결정을 내가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실은 이 또한 남편과도 내가 지극히 다른 점이었으리라. 그래서 그는 어느 순간 의견을 내거나 정하기를 포기하고 그저 내가 원하는 대로 정하는 대로 따라왔던 게 아니었을까. 반대로 나는 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던 탓에 내 기대에 미칠 만큼 열심히 계획하고 의견을 내고 따라주지 않는 그에게 늘 야속해왔다. 정작 내가 그에게 한 번도 제대로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인데 말이다. 이제야 이런 데에까지 생각이 미친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별거 후 바로 다음 주말이었던지라 나는 여행과 관여하여 아무 확인이나 결정 그리고 기대까지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에너지가 고갈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저 날 보면 ’ 방전‘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맞는 표현이었다. 오롯이 휴식만 간절히 원하고 구하는 상황, 그렇게 하기에 조용하고 오로지 볼게 바다밖에 없는 필리핀의 보홀이라는 작은 섬은 아주 적당했다. 또 여행을 함께 가는 사람이 제일 중요한데, 내 나이 21살 캄보디아 해외 봉사활동에서 만난 2살 어린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였다.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을 디테일하게 알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내 두뇌와 사고방식, 취향까지 모두 복사해 놓았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나와 닮아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내게 0편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던 이혼 파티를 열어 준 장본인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녀 또한 그 해부터 새로 다닌 직장과 일에 지쳐있던 터라 우리는 오롯이 ‘휴식’과 ‘재충전‘을 위한 시간을 보내기로 하고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채 정말 풀사이드바에서 술 마시며 쉬기 좋은 리조트만 예약하고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리고 이 여행은 나로 하여금 내 몸과 정신을 관통하는 가장 커다란 맥의 흐름을 바꾸게 된다. 바로 나도 그 동안 익숙했던 견고한 틀에 얽매이지 않는 몰랑몰랑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게 의외로 아주 나답고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


별거 그리고 치열한 대화와 긴장으로 몹시 지쳐있었고, 이러한 정신적 심리적 불안과도 함께했으니 나는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시간을 보내는 데에 집중했다. 그녀도 나만큼이나 물가를 좋아하는 사람, 발리를 여러 번 다녀온 사람이어서 몹시 호흡이 잘 맞는 여행 파트너였다. 우리는 아침이면 일어나 프라이빗 비치에서 수영을 하고 선베드에 누워 책을 읽고 그것이 질리면 수영장으로 뛰어들고 밀짚모자를 덮고 잠을 청했다. 풀사이드 바의 해피 아워는 한 잔을 마시면 한잔을 더 줘 만취하기에 그만이었다. 당시 맨 정신으로는 버티거나 잠을 청할 수 없었던 나는 이미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익숙한 동남아식 발음이 섞인 영어를 하며 바텐더 혹은 옆자리 외국인 숙박객과 떠들어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이면 우리는 호텔 조식의 국물 메뉴를 찾아 치열한 해장을 하고 마사지를 받고서 구토를 하기도 했다. 나는 심지어 여행 경비도 아예 그녀에게 줘버리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몹시도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다. 예전 같았으면 내가 모두 쥐고 있어야 할 텐데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살짝 여행만 떠나와도 이럴 수 있는 나인데 왜 그동안은 이렇게 얽매이는 게 지나치게 많았는지 질문하게 되었다. 쥐려면 쥐려고 할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잡히지 않는 것들을 그렇게 쥐려고 했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역시 사람은 끝까지 몰려야 변화를 도모하게 되는 건지. 어쨌든 지독하게 예민한 나를 누구보다 P가 되게 만들어 준 그녀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그리고 이제는 나 혼자서도 여기 호주에서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아무 시선으로부터 속박되지 않고 물 흐르듯이 이 휴식 시간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휴식을 위해 여기 호주 중에서도 연중 따뜻한 퀸즐랜드를 선택한 것은 참 잘한 일이다. 여기는 서울에 비하면 10배는 시간이 느리고 단조롭게 가는 느낌이다. 이곳 사람들의 일상은 새벽같이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고 2시면 카페 문을 닫고 4시면 사무실에서 퇴근을 하고 가족들과 저녁을 보내는 그런 하루이다. 그리고 주말과 일과 후에는 서핑, 태닝, 조깅, 반려동물과 산책을 하는 그들을 보면서 나의 서울의 삶과 비교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종종 그들과 우연한 대화를 해보면 내가 그동안 집착해 왔던 나의 껍데기와 조건들이 여기서는 얼마나 의미 없고 아무도 중요하다고 신경 쓰지 않는 것인지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나도 그저 알람대신 새소리를 들으며 눈을 뜨고, 적게 자도 피곤하지 않음을 느낀다. 그리고 오늘 하루도 온전할 하루를 그제야 계획하고, 못한 것이 있으면 꼭 해야지 하고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번에 또 언젠가 올 기회가 있으면 꼭 가야지’라고 생각하고 넘길 뿐이다. 건강하고 단출한 한 끼를 해 먹고 많이 걷고 자연을 느끼는 데 집중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심호흡을 하기도 하고 이렇게 글을 쓰고 명상을 한다. 이제야 오롯한 치유와 휴식, 목적에 맞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SNS에서 사람들에게 부친 글올해 목표를 나도 이제 다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 몰랑몰랑한 사람이 되는 것, 지나치게 높은 견고한 틀을 만들어 재단하거나 판단하지 않는 것, 그래서 나에게도 남에게도 너그러워지는 것으로 삼고 있다. 서울 자체도 이렇게 치열한데 나조차 나를 이렇게 높고 견고한 틀에 가두어서 괴롭혀 왔으니 내가 어찌 이리 병이 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원래’가 그렇게 딱딱하고 치열하고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 몰랑몰랑할 수도 있고 그것이 편안하고 아주 자연스러우니 기존의 틀을 조금씩 허물며 몰랑몰랑한 사람이 되는 연습을 계속할 것이다. 애초에 ‘원래’라는 것은 없었다. 내가 ‘자주 쓰는 말’인 이 ‘원래’라는 부사 또한 내가 만들어 낸 ‘틀’ 중의 하나였다.


이것을 느끼고 깨닫는 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려 돌아왔구나. 보홀 여행에서 얻은 내 삶을 자연스러운 방향으로 변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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