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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TJ K직장녀 Jun 02. 2023

이별 사유

나의 애도일지 6편

이쯤 되면 도대체 이렇게 미련이 흘러넘치다 못해 질척거리고 그리워하고 미워하지도 않으면서 왜 이혼을 했는지 정확한 사유가 궁금할 만도 하겠다. 여느 커플이 그러하듯 다툼의 이유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대부분 사소한 것으로 시작해 감정싸움으로 번지곤 하니까. 시작은 사소했으나 이 사소한 사건들은 차곡차곡 쌓여 바꿀 수 없는 결과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누구 하나 특별한 귀책사유가 없는 우리의 이별은 '가치관 차이'라는 장르로 협의 이혼에서는 분류되었다. 각자 입장에서의 이별 사유는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갇혀 어느 쪽의 인정과 타협 없이 늘 팽팽하게 놓여 있었다. 원인을 제공한 자는 제공한 자대로의 죄책감과 동시에 그 결과를 언제까지 감수해야 하는지 외치고 또 외쳤고, 결과를 제공한 자는 원인을 제공했으니 그에 대한 응당한 결과라고 생각하여 결괏값을 치르기를 원했으며 고통을 인정하지 않았다.


연초부터 남편은 먼저 나의 상담 선생님과 개인상담을 진행했다. 선생님은 내 속사정을 이미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남편과의 개인 상담 이후에 우리는 부부상담을 진행하게 되었다. 별거 시작 후 불편한 연말이 지나고 그가 고정된 편안한 장소에서 지내기 시작하면서 두 사람 모두 안정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우리는 설 즈음 부부 상담 시작 전에 한번 동네에서 브런치를 먹기로 하고 만났다. 이번에도 물론 내가 만나고자 했다. 동네에 새로 생긴 분위기 좋은 베이글 가게에서 만났는데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고 각자의 취향에 맞는 메뉴를 서로 골라 주었다. 이혼을 앞둔 부부의 만남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이런 우리의 방식이, 아니 늘 그랬듯 내가 제안하고 리드하는 이 방식이 맞다고 여겼다. 그의 얼굴은 편안했고 우리는 서로 어떻게 지냈는지 불편한 것은 없는지 가족들은 어떠한지 이야기했다. 그리고 우리 둘 모두 별거가 필요한 일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개인 상담을 하며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문제의 일부를 전문가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어 내가 항상 말하곤 했던 지점을 피부로 느끼고 받아들였다는 소기의 실적이 있었다. 늘 상담을 거부했었던 그가 상담을 통해 새롭고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하니 나는 진심으로 기쁨과 축하의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표현했다. 원두를 늘 사곤 했던 단골 카페로 자리를 옮겨 우린 한참 수다를 떨고 앞으로 상담을 어떻게 진행할지 논의하였다. 오랜만에 봐서 반갑고 좋은 기분으로 헤어졌다. 이때에는 앞으로의 상담이 잘 진행되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내가 시작한 결론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 나는 이미 정해놓았고, 다만 크게 고통스러운 시간이 아닐 줄로 알았다.


상담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스케줄에 맞춘 매주의 중간 수요일 혹은 목요일, 온 저녁 2시간은 치열하고 팽팽한 인정과 타협 없는 대립으로 가득 찼고 날 매번 미친 여자로,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지르거나 울부짖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상담을 하고서 늘 요가원에 갈 계획을 잡았지만 단 한 번도 갈 수 없었고 지쳐서 소파에 널브러지거나 세상이 떠나가라 서럽게 울곤 했다. 매주 상담하는 날은 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시간을 보낼 수 없는 밤이었다. 이 밤이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접촉 없던 평온한 일상에서 갑자기 지옥 같은 날들이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다음 날은 회사에 출근하지 못했다. 이렇게 힘들 줄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시작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그래도 나는 시작했기 때문에 마쳐야만 했다.


내가 부부 상담에서 그에게 인정을 요구한 몇 가지는 한결같고 간결했다.


우린 대부분의 시간 동안 섹스 리스였다. 아주 섹스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기능상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만 문제가 된 것은 이십 대 중후반의 젊은 나이에 결혼한 내가 성욕을 해소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여성으로서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고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상실했다는 느낌을 받는 데서 오는 소리 없는 고통이었다. 그는 언젠가부터 내게 섹스를 요구하지 않았다. 늘 요구하는 것은 내 쪽이었다. 지금은 그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는 섹스를 별로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랑 없는 섹스는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네게 말할 수가 없으니, 내가 섹스를 먼저 요구하는 것을 그를 그저 섹스를 해주는 사람으로 도구화하고 내가 사랑 없는 섹스만을 요구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그의 언행이 내게 수치심을 일으켰다. 때때로 성을 돈으로 사는 게 차라리 덜 수치스러울 수도 있겠다고도 생각했다. 나는 이전에 섹스는 신이 인간에게 내린 축복 중에 하나이고 부부나 연인이 할 수 있는 즐겁고 성스러운 일로 여겼다. 또 반면 그와는 달리 본능이 결부된 섹스와 사랑은 어느 정도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해서 부부로 계약 관계를 맺었으면 응당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냐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계속된 수치심은 내게 쌓인 성욕만큼이나 남성과 섹스와 나를 옭아매는 결혼이란 사회 제도에 대한 뒤틀린 분노를 만들어 내었다. 그래서 섹스 리스 결혼 생활은 내게 수치심으로부터 오는 억울함이 되어 가슴에 아물지 않는 멍으로 새겨졌다. 그는 이런 내 여성으로서, 아내로서의 수치심에 자신이 기여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비슷한 시간 사무직 노동을 하고 비슷하게 버는 맞벌이 직장인 부부였다. 그가 나이와 경력이 있으니 나보다 조금 더 벌긴 했다. 하지만 결혼 생활 내내 모든 집안일의 90%를 내가 전담하고 집안의 대소사를 나 혼자 챙겼다. 나는 그런 나를 늘 이 집의 가장같이 여겼다. 집안의 대소사 중에 그의 어머니의 칠순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 나 혼자 1부터 100까지 모든 것을 준비하고 그는 참석만 했다. 그는 할 마음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기회를 주지 않아서, 내버려 뒀으면 자기가 했을 텐데 내가 먼저 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면 좋은 것이 아니냐 했다. 돌이켜보면 신혼 때부터 비슷한 문제로 삐걱거리긴 했었다. 아주 신혼에 나는 집안일 리스트를 배분하길 원했는데 그는 그저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다 보면 저절로 잘 되지 않겠느냐고 하며 결코 정하질 않았다. 나는 내가 그런 '부자연스럽게' 자꾸 일을 만드는 사람, 먼저 싸움을 시작하는 사람, 잔소리를 하는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 싫어 내가 꾸역꾸역 하곤 했다. 나도 결코 하고 싶지 않은데 누군가 해야 되니까 결혼을 했으니까 의무를 다하기 위해 하는 것이었다. 나와 다른 그는 그저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도 충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결과론적으로 그가 집안일에 기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상담 내내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인 사람이고 합리성과 타당성을 사랑한다. '왜'가 중요한 사람이고 그것이 납득이 된다면 설령 무엇이라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나는 이미 일어난 일인 이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그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어 미친듯 대립했다.


위 두 가지 결과는 나의 이별 사유고 결과다. 원인은 내가 제공했다고 한다. 이것이 유일한 그의 이별 사유다. 그는 직장에서 부서 이동을 하고 많이 힘들어했다. 새로운 부서는 한국 대기업인 그 회사 내에서도 가장 보수적이고 엄격한 조직으로 특수한 의무를 많이 요구했다. 특수한 만큼 보상도 따르고 원한다고 아무나 갈 수 있는 부서는 아니었지만 그가 원하는 일도 잘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런 그를 보듬어주고 북돋아주기는 커녕 나는 그가 나약하다 왜 이겨내질 못하냐 많이도 다그쳤다. 아마 내가 같은 회사를 다녔으니 그곳의 생리를 잘 알기에 더 가혹했던 것 같다. 그는 내 앞에서 늘 작아진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늘 내게 충분하지 못했다. 그는 그래서 아파졌다. 때때로 회사를 못 가는 날들이 많아졌다. 나는 걱정보다는 대중교통을 타고 갑자기 출근을 하게 되어 짜증을 내는 못된 아내였다. 그는 이후에 휴직 권고를 받고 6개월간 쉬게 되었다. 보수적인 한국 대기업에서 그런 6개월 휴직은 커리어 측면에서는 커다란 금이 되었다. 그는 휴직이 끝나고 해당 부서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그가 아픈 것을, 이런 시간을 겪어야 하는 것을 내 탓으로 여겼다. 아마 탓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하면서 서운함과 상처를 토로하고 싶었으리라. 그때 나는 억울했다. 그가 나약해서 이겨내지 못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내로서 보듬어주지 못한 것을 나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때에 이미 첫 별거를 했는데, 그의 상처는 딱딱하게 굳어 그때부터 마음의 문을 닫고 다시는 열어주지 않았다. 별거를 끝내고 다시 만났을 때 나는 그가 나를 용서하고 내가 노력하면 그의 마음이 열릴 줄 알았다. 뒤늦게 그의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내가 그를 사랑해서 마음의 문을 두드릴 때는 그의 사랑은 사망 선고를 받은 뒤였다. 나는 죽어도 알 수 없었다. 마음의 결이 여린 그는 용기도 힘도 없어서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밖에, 내가 먼저 이혼을 하자고 하기 전에 시작할 수 없어 나름의 연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는 부드럽고 관대하고 사려 깊고 감수성이 깊은 사람이었다. 다소 어두워도 그만의 색깔이 있는 사람이었다. 나의 사소한 언어에서 나오는 취향을 꼭 기억하고 우리만의 이벤트로 만들어주는 영화 같은 연애의 날들이었다. 이를테면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재즈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아무도 없는 안국동에서 새벽에 그 노래를 틀어 놓고 우리만의 미드나잇 인 서울을 찍곤 했다. 나를 낭만적일 수 있게 해주는 그런 그의 면면을, 내게 부족한 면을 사랑했다. 나보다 문학과 시를 사랑하고 영화와 전시회를 놓고 몇 시간이고 떠들 수 있으며 누구보다 내게 잘 어울리는 옷을 사다가 코디해주는 사람이었다. 호퍼가 그린 뉴욕의 골목골목을 이야기하면서 즐거웠다. 서로에게 그림을 선물하기도 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비슷한 취향이 닮아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삶이란 마냥 낭만적일 수는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았다. 낭만적인 삶을 꿈꾸곤 했던 '섹스 앤 더시티'의 캐리가 되고 싶었던 나는 그때는 지루한 서울시 대기업 직장인의 삶에도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다소 현실적이고 냉정하고 이성적인 구석이 많은 사람이다. 어쩌면 그도 내 그런 반대에 끌렸겠지. 그는 내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좋아한다고 스와로브스키에서 80만 원짜리 앨리스 오브제를 선물했던 로맨틱한 사람이었다. 나는 당장 여의도 스와로브스키로 뛰어가 환불하고 싶었지만 그가 상처받을 까봐 꾹 눌러 참는 사람이었고.


그런 그는 결혼도 마냥 낭만적이고 행복한 일쯤으로 여겼던 것 같다. 아니 우리의 결혼은 여느 결혼 생활과 다를 것이라고, 꽃길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나는 찬란했던 우리의 결혼식 날 축가로 윤종신의 '오르막길'을 불러달라고 했다. 결혼은 낭만보다는 생활이어서 오르기 전 미소를 기억해둬야 할 만큼 끈적이는 땀과 거칠게 내쉬는 숨이 필요한 일이란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축가는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내가 그에게 이 '가파른 길'을 함께 오르자고 하는 약속과도 같은 세레머니였다. 어렸지만 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결혼 생활은 '실전'이고 '냉혹한 현실'이고 두 우주가 통합해야 하는 일이니 분명히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우리는 이 오르막 길을 함께 사랑이면 이겨낼 수 있을 줄 알았는 데 오르막 길을 오르는 속도와 방식이 너무 달라서 그와 함께 오를 수가 없었다. 반드시 올라서 만날 필요는 없지만 아쉬운 것은 결혼이라는 실전에 임하기 전에 전략을 충분히 검토했어야 하는데, 우리는 낭만에 취해 다소 순진무구했음에 틀림이 없다.


지금 여행을 계속하는 나날 동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을 보고 경험하고 먹고 마신다. 좋은 것을 만날 때마다 나와 취향이 닮은 그에게 재잘재잘 공유하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래서 더 그립다, 아니 그립다고 착각한다. 그가 이따금 내 스토리에 하트를 눌릴 때면 그를 그리워하는 기분에 아직도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지곤한다. 나는 이제 안다. 여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를 뒤늦게 많이 사랑했던 내 모습 혹은 행복했던 우리 연애 시절의 모습임을. 그래서 나는 다시 그를 사랑해서 행복할 수 없으므로 혼자서 평온하기 위해 이별을 택했다.


또 나는 이제 안다. 그는 좋은 신발이었으나 내게 꼭 맞는 신발이 그저 아니었음을. 마치 신발장에 처박혀서 빛을 못 보는 발 아픈 명품 구두 대신 편안한 나이키 운동화를 매일 신는 것처럼. 나는 결과도 중요한 사람이었고, 그는 이유만 있어도 늘 충분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런 내게 충분하지 못했다. 취향이 누구보다 잘 맞는 우리는 친구로서, 친한 오빠 동생으로서는 아주 충분히 완벽할 뻔했다. 완벽한 것은 본래 없지 않은가. 이것이 우리의 사소한 이별 사유이고 내가 속상해서 애도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를 절대로 미워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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