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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물 Jan 19. 2020

공개적 비밀

비밀은 맵고 짜고 다네요


35mm책방에서 김이슬 작가님을 비롯한 여덟 분과 함께 영화 'Side Walls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를 보고, 이런저런 사담을 하다가 '말할 수 있는 비밀'을 공유했습니다. 일곱 개의 비밀이 공간을 채웠습니다. (사장님은 슬쩍 빠지셨거든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비밀을 낭독했지만 장난스러운 표정과 속닥이는 몸짓, 움찔거리는 눈썹들 엿봤니다. 비밀이라는 단어가 주는 야릇하고 몽글한 기분을 잔뜩 맛보고, 대나무 숲에서 포식한 당나귀 귀를 만지작거리며 나왔습니다.

준비해 간 말할 수 있는 비밀 세 가지를 이곳에 질러봅니다.


측벽, 2011



언젠가부터 술에 취하면 "우리, 비밀 얘기 하자." 말하는 것이 주사가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무조건 상대방의 비밀 얘기를 먼저 듣는 것인데 어째서인지 실패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상대가 말할 비밀을 찾는 동안 나 역시 말할 비밀을 찾는다. 상대가 털어놓는 비밀만큼이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 역시 털어놓는다.

나에게는 말할 수 있는 비밀이 많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끝내 말할 수 없으므로 당신과 나는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다.


_김이슬, 김이슬 사담 중




1. 취기

저는 술을 간절히 원하고 강하게 원하지 않습니다. 꼭 안아 붙들어서 눈 마주치지 않고 싶습니다. 간만에 음주하지 않는 일상을 보내고 있자면 갑자기 술 먹자 전화 올 몇몇 친구들을 손꼽아 기다리지만 정작 본인은 통화버튼을 참아보곤 합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것들은 또한 경계해야 함이 애석합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깨에 힘을 빼고 넋두리와 이야기 꾸러미를 풀어놓을 때면 신이 납니다. 술잔이 기울고 병이 쌓일수록 들뜨는 마음, 당장 우리밖에 없는 듯 한 비밀 얘기, 아랑곳 않고 흔드는 몸이 화음을 이루는 근사한 순간들을 사랑하고 경계합니다. 그런 황홀함은 모순이나 허함과 등 맞대고 있거든요. 혼자 있는 저는 자주 그들과 함께한 어제를 그리워합니다.

이번 주는 술 약속이 많아 고심한 주인데요, 마침 오늘 약속이 취소됐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또 '술 먹자 전화 올 친구들'과 방어를 앞에 놓고 거나하게 취했네요. 이 글에는 소주 몇 병이 묻어있습니다.


2. 일곱 가지 쓰레기봉투

친구들과 이렇게 술병을 앞에 두고요, 우리가 얼마나 쓰레기인지에 대해 얘기 나누곤 합니다. 쓰레기의 정의며, 기준 같은 것까지도요. 그러다가 한 번은 쓰레기의 기준을 '유명인이 된다면 돌팔매질 없이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는가?' 손정해봤습니다.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함께 깔깔거리며 웃었어요. 살아남을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제가 청렴한 유명인이 되기 위해서는 크게 일곱 가지의 비밀을 지워야 합니다. 신분세탁이라도 해야 겨우 가능하겠습니다. 저는 관심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남은 인생을 위해 소규모 스타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어요. 우리끼리만 아는 탁월함으론 쉽게 스타가 될 수 있고, 끌어내릴 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일정 부분 쓰레기입니다. 거기에 냄새나는 안도를 느낍니다.


3. 말할 수 없는 비밀

역대 모임에 가져가야 했던 것 중 가장 어려운 숙제로 느껴졌습니다. 진짜 비밀은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모순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제게 영원한 비밀은 망각 속에나 존재하고요, 큰 비밀 앞에서 작은 비밀은 금세 잊히거나 비밀 직급을 박탈당합니다. 망각 없는 덩치 큰 비밀을 단속하느라 작은 비밀이나 말할 수 있는 비밀은 생각할 겨를 없습니다. 앞선 일곱 가지를 비롯한 101마리의 비밀은 잠시 꼬리 내려놓고요, 언제고 안주거리로 기꺼이 올릴 수 있는 보따리를 찾아 내놓습니다.

엽고 시시콜콜한 비밀을 한두 개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졌습니다. 뒤 돌아 몸을 베베 꼬고 있다가 아, 그거~? 수줍어 달은 볼을 가리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이요. 그렇게 만들어 낸 비밀을 애틋하게 만지작거리다가 여기저기 내놓을게요.

그동안은 제가 거짓말 좀 하겠습니다.



모임에서는 이 세 가지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과 둘러앉아 대화하다 보니 좀 더 발칙하고 자극적인 얘기를 하고 싶어 졌거든요.

가장 큰 비밀을 공개한 이에게 선물이 주어졌는데요, 단연 섹스 얘기가 제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야하고 치정 어린 얘기를 곁눈질하며 즐거워합니다. 비밀은 역시 맵든 짜든 달든 자극적인 게 제맛입니다. 더할수록 진절머리 나고 과할수록 땡겨요. 섹스 얘기는 이제 지긋지긋하고 저는 지긋지긋한 얘기를 계속합니다. 타인의 발가벗은 속내를 들으며 또 지독한 짜릿함을 느꼈습니다. 다시 한번, 냄새나는 안도를 느낍니다.


비밀과 아쉬움은 책방에 두고 나왔습니다. 깜박 두고 온 것을 찾는 시늉 하며, 또 들르게 되겠지요.


제게 영원한 비밀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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