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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물 Feb 18. 2020

지워지길 바라는 편지

너무도 네가 생각나는 노래여서 웃음이 났어

일할 때는 그렇게 하기 싫었는데 끝나니까 순식간에 다시 무력해지는 거 있지. 노동과 견디는 마음은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아.

이번에 며칠 일하는 동안 집밥을 못해먹어서 오늘 기대하는 마음으로 밥을 짓고 아보카도 비빔밥을 만들었어. 곤약을 데쳐서 갈고, 쌀을 씻고 둘을 섞은 다음 불 조절을 하며 냄비에 밥 짓는 일이 달게 느껴졌다. 밥을 많이 하는 바람에 무려 14인분 소분해서 얼려뒀어. 앞으로 열네 끼는 걱정 없겠다 생각하며 늦은 점심을 싹싹 긁어먹었어.

아보카도 비빔밥 위에 올라간 계란은 어제 30구 5500원에 마트에서 산 것인데, 그걸 한 손에 들고 가는 길에 '맛 최고! 가격 최저!'라고 적힌 한국 통닭에서 5000원에 팔리는 닭 더미를 봤어. 저 닭들은 몇 개의 알을 낳고 튀겨졌을까? 제 알 30개와 나란한 값으로 진열된 닭을 보면서 멍해졌다. 노랗고 을씨년스러운 간판 아래 그 닭 모양의 음식을 한참 보다, 계란을 환불하려고 마트 쪽으로 다시 돌아가다, 또 그만뒀어. 닭과 달걀이 준 회의감보다도 무력감이 강했거든. 그렇게 집까지 들고 온 계란 한 판의 첫 하나를 저 아보카도 비빔밥에 올린 거야. 맛있었다.

일상을 무표정으로 보내고 있어. 웬만하면 하지 않는 쪽으로, 몸을 사리는 쪽으로, 좋은 게 좋은 쪽으로 부스럼 날 일 없는 쪽으로 기울고 있어. 이 각도가 무섭다. 무섭다고 적으면서도 별로 무섭지 않은 내가 답답해. 마음이 좁아지니 아무것도 담을 수 없어. 보려 하지 않으면 보지 않을 수 있는 진실이 세상엔 많고 불편함은 감수하던 사람만 계속 감수한다. 모퉁이에서 비겁한 게으름에 포동포동 살이 오르고 기름져지고 있어.

최종 파일을 넘기고는 다시 할 일 없는 사람이 됐다. 멍하니 피드 새로고침을 누르길 몇 번째, 볼 것도 다 떨어졌네 하고 카톡에 들어갔다가 프로필 사진을 죽 내려봤어. 무심코 누른 네 프로필 사진은 어떤 아티스트의 스토리 캡처해 올린 모양이었다. Erlend Oye.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어. 네 일상의 배경음악이 문득 궁금해져서 그 사람 노래를 모아 틀고는 향을 고 책을 가져와 앉았어. 너무 네가 생각나는 노래라 웃음이 난다. 너로부터가 아니라도 어딘가에서 들으면 네가 떠오를.

전에 너랑 몇 시간이고 통화하며 서로를 구덩이에서 건져주곤 했잖아, 오늘도 덕분에 간만에 울었다. 이걸 적는 동안 오여의 목소리가 죽 함께였어.


요즘은 글이 써지지 않는다. 문장만 쓰이고 글이 쓰이질 않아. 문장 몇 개만 붙여놔도 모순 같고 엉터리 같고 그래. 너에게 적는 이 말 모음도 글이 될 수 없겠지.  

네가 보고 싶고 딱히 보고 싶지 않다. 활기를 되찾고 나면 너를 있는 힘껏 보고 싶어 해야지. 그때를 손꼽아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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