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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물 Jun 12. 2020

그럴 때 사노 요코 씨를 생각해 볼게

언젠가 우리 넉넉히 만나면 남쪽으로 여행을 가자


1967.


여기 온 이래 생활 리듬이 깨져서 편지를 쓰지 못했어요.

몇 번을 써도 안 됩니다. 저는 소설가를 포기하고 이태리에서 우표팔이 아줌마를 해야겠어요. 돈 계산을 속이는 우표팔이가 되어 택시 운전기사를 하는 남편하고 둘이서 그날 수입을 계산하면서 살면 인생이 즐거울 것 같아요. 사람을 여럿 속이고는 낮잠을 자요. 그래도 신앙이 두터워서 교회에 가 얌전하게 고해를 하고 몇 번 기도하며 용서를 받은 다음에 상쾌한 기분으로 다시 장사를 할 거예요.


건강하신지요?

철학에서도 과학에서도 슬픔을 느끼는, 전기담요를 붙들고 사는 벗이여. 베를린에 계속 있으면 당신은 갈수록 점점 스스로를 닮아 버리겠지요.

당신을 접어서 속달우편으로 밀라노에 보내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스스로에게서 좀 멀어지고 전기담요에서 얻는 행복보다 좀 더 큰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저는 남쪽으로 갈수록 행복한 것 같아서 나중에 남쪽으로 내려가서 장화 끝에 매달려 보려고 합니다.

역시 잘 써지지 않네요. 날씨 좋은 곳에서 맛있는 것을 먹는 바람에 슬럼프에 빠졌어요.

잘 쓰지도 못하는데 이제 종이마저 없어서 곤란해요.

천재도 이탈리아 기행을 쓰지 못해 붓을 꺾어 버리고 만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아무래도 우표팔이 아줌마보다 야채가게 아줌마의 속임수가 더 만만치 않으니 저는 야채가게 아줌마가 될까 봐요.

여기서 저는 웃음을 참지 못할 만큼 기분이 좋아요.

먹고 자는 일에 전념하며 게으름뱅이로서의 참된 행복을 추구하기로 했어요. 낮잠을 네 시간이나 자는 사람은 출세하지 못하겠죠.

아, 정말 슬럼프네요. 글이 잘 안 써져요. 천재는 괴로워요.

너무 많이 자서 망한 것 같아요. 다시 일어설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리스트를 받지 못해서 여동생에게 책 발송을 부탁했습니다.

금방 보내 줄 거예요. 다른 책은 잘 몰라서 릴케 것만 부탁했어요. 늦지 않을지 걱정하고 있습니다.

제가 뭘 먹고 있는지 알면 당신은 샘이 나서 끙끙거릴거예요.


친애하는 미스터 최/ 사노 요코, 최정호



빈!

여름 글 녹음한 걸 보내려 했는데 도쿄는 아직 여기만큼 덥지 않구나. 한국은 엊그제부터 불볕더위야.

좀 더 여름을 실감할 때 보내야겠다. 그래도 뭔가 고 싶어서 요즘 좋아하는 글을 읽어 보낸다.

'사노 요코'라는 일 동화 작가의 글인데 너도 아주 좋아할 것 같아.

사노 요코의 이야기들은 죄다 귀엽고 엉뚱하고 유쾌한데다 따뜻하게 깊거든.


사노 요코한테는 최정호라는 한국인 친구가 있었는데, 처음 베를린에서 만났다 헤어진 1967년부터 40 년 동안이나 편지를 주고받아.

주고 - 받는다기에는 사노가 열 통 쓸 때 미스터 최는 한 통이나 겨우 보내는 정도지만, 그게 전혀 과하거나 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낭독한 책은 '친애하는 미스터 최',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책이야. 사노가 죽고 나서 최정호가 직접 엮었어.

그중 사노 요코가 베를린에서 친구들과 이별하고 밀라노에 간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편지를 낭독했어.

그의 편지는 단정하고 진하기보다는 우당탕 아무 말 대잔치에 가깝다? 일단 쓰고 그냥 보내고 답이 안 와도 편지를 부쳐.

세상을 재밌게 보내느라 웬만한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의 글 같아. 그런 식으로 평생 170권 여의 책을 내고 늘어지게 잘 살다 재밌는 할머니로서 생을 마감한다. 이 사람은 자주 나한테 용기가 돼. 빈에게도 좀 환기가 됐으면 좋겠다!



아까 윤이랑 얘기하고 워드 창을 켜서 씩씩하자고 썼어.

눈물 흘리다가도 다시 씩씩해질 수 있는 부지런한 사람이 돼야지, 하고 말이야.

'세상을 재밌게 보내느라 웬만한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 너무 좋다.

용기를 가지자고 주기적으로 다짐해도 그게 오래가지 않고 잘 안되는데 그럴 때 사노 요코 씨를 생각해볼게.

나도 남쪽을 좋아해서 자주 남쪽에 내려가서 뭐를 팔고 살아야 하나 고민하고

엄마랑 오빠랑 같이 가야 하나 혼자 가야 하나 고민.

요번 낭독은 군데군데가 눈물 지뢰라서 나중에 또 답장을 쓸게.

근래는 눈물이 나도 금방 그쳐야지 하고 울음이 되지는 못했어.

눈물이 나려 하면 아 요즘 힘들었나 보다 하고 말았거든. 오늘은 덕분에 눈꺼풀이 무거워졌고 코가 꽉 막혔다.



사노 요코의 남편과 사노 요코와 최정호   

내 다정에 항상성이 없어서 자주 소홀한 사람이 되고 만다.

무턱대고 해보는 게 어려워서 제대로, 좀 더 해보려다 시기를 놓치거나 시작도 못하기 일쑤야.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기대하지 않게 되는 사람인 게 싫어서 전전긍긍하면서도 마음은 바쁘게 불안하고 몸은 한없이 게을러져.

지난번에 다 같이 모였을 때도 빈 섭섭하겠다 했는데 또 그렇게 놓쳐버린 거 있지.

내가 놓친 마음을 뭉치면 얼마나 클까. 요코 할머니가 40년간 바지런히 편지를 부쳤던 것처럼 부족하더라도 꾸준한 사람이 되고 싶다.

부족함이 두렵지 않은 사람. 놓치지 않는 삶이란 없을 것 같지만 내가 쥐고 놓치는 게 뭔지는 알면서 살고 싶어.


씩씩함도 농담도 여유도. 취하고 싶은 건 죄다 의식하지 않으면 멀어지는 듯 해. 그래도 놓쳐버리는 게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우리한테 남은 긴 시간에 무수히 많은 슬픔과 낙담이 진을 치고 있겠지만 그만큼 다시 씩씩함을 되찾을 기회, 새로 알게 될 근사한 농담, 작은 것에 넉넉한 마음을 가질 순간도 넘쳐날 거야. 기대되지 않니! 그렇게 우리도 귀엽고 재밌는 할머니가 되자.


사노 요코는 서른두 살에

'저는 그렇게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서 죽을 때도 더 살고 싶어 할 거예요. 훗날 할머니가 되는 것도 즐겁게 기다리고 있어요. 노망든 체해서 사람들에게 심술부리고 미움을 받는 것도 재미있지요.' 라고 말.

막막할 때엔 이제 웬만한 건 아무렇지도 않지만 웃음과 장난에는 진심인 존나 쎈 할머니가 된 우리를 상상하자. 호호 웃기만 하지만 침묵 속에 거대한 이야기를 덤덤하게 품고 있는 씩씩 결정체 할머니!


밤에는 또 선선하다. 바람이 밀어주니까 아직 젊은이 중에 젊은이인 우리는 부지런해질 수 있을 거야.

또 주저앉아도 돼. 그때마다 다시 씩씩할 기회도 찾아오니까!

언젠가 우리 넉넉히 만나면 남쪽으로 여행을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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