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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물 Aug 17. 2020

선생님, 저는 주먹밥이 되었습니다.

어째서 요즘 제 글에 등장하지 않으세요? 섭섭합니다.

선생님. 어째서 요즘 제 글에 등장하지 않으세요? 섭섭합니다.

최근 메모는 잡히지 않는 것으로 가득했는데요, 당신과의 산책을 천천히 되새기면서 겨우(그리고 잠시) 돌아왔습니다. 그런 걸 잊고 여태 뭘 했던 걸까요? 바보 같은 시기를 살뜰히 흘려보냈어요.


너무 안심하거나 위로하지는 말아주세요. 당신이 답장을 궁리할 즈음에 저는 또 든 것 없는 배낭을 꾸려 뜬구름을 사냥하러 갔을 테니까요.

선생님께서는 이토록 말 안 듣는 애(새끼)는 없었다며 저를 미워하는 척하셨지요. 나중에는 잔소리도 이만 멈추고 제가 입을 떼기까지 기다려 주시던 게 생각납니다.

그게 체념이었던가요. 배려였나요.

우리가 깊어진 탓이었나요, 길어진 탓이었나요.

당신 혹은 그때만 알겠지요.

가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떤 날은 그런 질문을 지붕 삼아 살아요.

저는 느슨한 사람들 사이에서 잠깐 평안하고 심심합니다. 튼튼한 처마 아래서 강 건너 불구경이나 실컷 하고 있어요.  폭우도 태풍도 모두 옆동네 이야기지요. 종일 대문 밖만 바라봐도 우체부 한 명 지나가지 않습니다. 꼬리 흔들 일이 뜸하니 바람에 살랑이기나 합니다. 이곳에서 한동안 지루하게 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박차고 나갈 작정이에요. 그때를 너무나 고대하고 있어서요, 머리도 그날에 잘 어울리게 잘랐습니다.


우리가 한동안 만나지 않을 것 같으니 여기에 그려드릴게요. 저는 그림은 못 그리지만 글자는 잘 그리니까요, 미리 상상해보세요.

전에 만났을 때보다 짧고 우둔해졌고요, 난생처음 밥알을 뭉쳐보는 이가 만든 주먹밥같이 생겼습니다.

예고 없이 벌떡 일어나 춤을 추게 생겼습니다.

즉흥적이고 단순하게 생겼습니다.

예닐곱 살 난 인디언의 치마처럼 생겼습니다.

어떤 모양이 그려졌나요? 당신이 신문물을 접한 족장처럼 좋아라 했던 갤럭시 노트에 그려 보내주세요. 채점을 통해 경품을 드리겠습니다.

선생님께서 바보 같다고 할지, 귀엽다고 할지 모르겠어요. 그런 상상을 실감 나게 해내기 위해서 싹둑 잘라버린 걸지도 모르고요. 나를 아는 사람들이 김 조각 붙은 주먹밥의 면상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떠올리는 일은 한 저녁을 꼬박 즐겁게 했습니다. 혼자 머리를 쳐낼 때 낄낄거렸던 것처럼 대부분의 이들이 파안대소를 했어요. 그럴 때 더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요, 내 볼이나 앞머리를 한 번씩들 만지작거립니다. 즐겁고 통통한 주먹밥이 된 기분이에요.


당신은 아마 이 앞머리가 어울리는 건 지루한 처마 아래라고 설득하실 테지요. 빗소리를 들으며 주먹밥이나 까먹으라고요. 비를 맞을 수 없는데 쌀알 뭉치가 다 무슨 소용이랍니까. 거기다 엉성한 주먹밥은 참을 수 없게 밍밍합니다.

괜찮은 속재료를 구해다 오겠습니다. 겉은 새하얘서 속을 알 수 없는 주먹밥 아시지요? 안에 뭐가 들었는지 두 입 베어 물기 전까지는 알 턱이 없는 김밥이요. 깜짝 놀라게 웃기고 재밌는 속재료를 사냥하러 나서고 싶어요.

오늘은 오랜만에 약속도 기대도 없는 주말 이어서요, 새로운 머리에 어울리는 우스운 니트를 수확해서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 입어드리지요. 멀리서 초록색 뜨개 주먹밥이 손을 흔든다면 저인 줄 아세요. 희희낙락 거리기에 딱 알맞은 모양이니, 부디 뒷걸음질 치지는 말아 주세요. 선생님은 저와 시시콜콜한 얘기를 주고받는 것을 좋아하잖아요.


그날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싶은 일이 몇 개, 그만 놓고 싶은 일이 두 주먹 있습니다. 그때쯤이면 모두 시시콜콜해지겠지요.

그러니까 우리의 재회 날 아직 지루하게 평안하고, 바보 같고, 잘 까먹은 저를 만나시기를 기원합니다.


주에 한 번쯤은 당신을 상상하면서 다음 만남을 기다릴게요. 당신을 떠올리는 데에 오분 이상 쓰겠다고는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동네의 마당 개도 나름의 할 일로 바쁘답니다.


제 상상과 비슷한 여름을 지내셨는지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겠습니다. 

모든 게 지나가고 찾아왔을 그날, 마지못해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세요. 동그란 웃음을 지어 보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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